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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020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집필자 이원석

[개설]

영천시는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350㎞ 지점에 위치하고, 경상북도의 동남부에 자리 하고 있다. 또 동쪽은 경주시와 포항시, 서쪽은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남쪽은 청도군, 북쪽은 청송군과 군위군이 접하고 있는 경북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이다. 역사적으로는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및 봉수대(烽燧臺)와 연관이 있었고, 시장 및 교통망의 중심지로 대변되는 영천의 역할과 미래 가치를 조명한다.

[조선통신사와 영천]

1. 조신통신사의 주요 노정상의 영천

영천은 역사적으로 한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조신통신사의 주요 노정에 있던 지역이었다. 다음은 1763년(영조 39) 조선통신사 정사(正使)를 맡은 조엄(趙曮)의 『해사일기(海槎日記)』에 기록된 내용 중 일부분으로, 당시 조선통신사 행렬의 모습과 영천에서의 전별연 장면 및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는 역사 기록이다.

8월 15일(기해) 맑음.

신녕에 닿았다. 새벽에 세 사신 및 일행들과 함께 관복을 갖추고 망궐례를 행하였다. 저녁에 신녕현에 이르니 주수 서회수와 군위 현감 임용, 성현 찰방 임희우, 지례 현감 송부연이 보러 왔다. [중략] 이날은 90리를 갔다.

16일(경자) 맑음.

영천에 닿았다. 도백 김상철이 보러 오고, 이어 전례인 전별연을 조양각 위에 벌였다. 내가 비록 복제[상복 차림] 중이나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풍악을 울리고 상을 받을 때엔 방안으로 피해 들어갔다. 반나절 동안 순상[도백]과 세 사신들은 이야기를 하였다. 대개 이는 영남의 성대한 모임이므로 구경하는 사람이 거의 만 명으로 헤아려졌다.

영천은 대구에서 경주로 가는 길과 의성에서 경주로 가는 길의 합류 지점이자 중요한 길목이다. 통신사 사행로는 영남대로와 달리 경상도의 중심인 대구를 비껴갔다. 대신 영천이 서울~충주~안동~의성~영천~경주~부산~이즈하라~가쓰모토~아이노시마~시모노세키~가미노세키~가마가리~우시마도~무로쓰~효고~오사카~교토~오미하치망~오가키~오다와라~도쿄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2. 조선통신사 관련 유적

1) 장수도 찰방(長水道察訪) : 영천 신녕면에 있던 장수(長水)·청통(淸通)·아화(阿火)·모량(毛良)·사리(沙里)·우곡(牛谷)·경역(鏡驛)·조역(朝亦)·인비(仁庇)·의곡(義谷)·압량(押梁)·부평(副平)·청경(淸景)·구어(仇於)·화양(華陽) 등의 역(驛)을 관할하던 찰방이다.

2) 조양각(朝陽閣) : 조양각은 1368년(고려 공민왕 17) 당시 부사였던 이용(李容)이 영천시 창구동에 건립한 것으로 명원루(明遠樓) 또는 서세루(瑞世樓)라고도 불리었다. 1981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조양각에는 수많은 명현과 풍류객들의 시구가 조각된 80여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창건 당시에는 조양각을 중심으로 좌우에 청량당(淸凉堂)과 쌍청당(雙靑堂) 등 여러 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638년(인조 16)에 중건한 것이며 통신사 일행이 전별연(餞別宴)·마상재(馬上才)를 하던 장소이다.

[영남 3대장으로 꼽힌 영천시장]

우리들 속담에 “영천장에 콩 팔러 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영천장이 그만큼 유명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전국의 군소 도시 중에 하필이면 영천시장을 거론한 것은 상거래가 활발했다는 증거가 되겠다. 또 거래 상품 가운데는 콩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러한 속담의 이면에는 무서운 의미가 깔려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죽으러 간다는 의미라고 한다. 영천장은 콩의 소비가 좋았고 이를 팔기 위해 인근 고을에서 많은 생산자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옛날의 시장 생태가 그러하듯이 장꾼들은 5일 동안 미루어 두었던 모든 볼일을 보고, 심지어는 일가친척을 만나는 사연까지 곁들이다 보면, 어느덧 해는 서산에 기울게 된다. 이때 서둘러 갈 길을 재촉하여도 산길은 험준하니 자연 산적을 만나기 마련이다.

당시의 교통망을 살펴보면, 안강·포항·영일 지방을 향하는 곳에는 시티재가 있고, 입암·죽장 지방으로 향하는 곳에는 보현산(普賢山) 준령이 있으며, 청송 방면으로 향하는 곳에는 노귀재[오랑캐가 되돌아간 곳이란 뜻]가 있고, 군위·의성 방면으로는 갑티재가 있고, 달성·대구·칠곡으로 향하는 길에는 은해사(銀海寺) 일대의 팔공산(八公山) 준령이 있고, 경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채약산(採藥山)과 구룡재가 있고, 청도로 향하는 길에는 오재가 있었다.

이처럼 팔방으로 험준한 산이 버티고 있으니, 당시 조직화되지 못한 사회에서 도적이 없을 리 없다. 이들 무리들은 결국 영천장에 콩을 팔러 갔던 장꾼들의 호주머니를 털고 살인까지 하였으므로, 위의 속담이 생긴 것이라고 대부분의 노인들이 증언하고 있다.

여하튼 영천 큰시장이 대구 약시장(藥市場), 안동시장과 함께 경상도의 3대 시장이라고 전해진 것이다. 영남 3대장으로 꼽힌 명성답게 영천시장에는 사람과 산물이 많이 몰리는 곳이었으나, 이에 대한 참고 자료로는 『영양지(永陽誌)』 등 몇 군데에만 시장이 있었다는 간단한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오히려 속담(俗談)이나 구전(口傳)이 많은 편이다.

영천 지방이 시장으로 번창한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선 교통의 중심지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앞서 쓴 바와 같이 영천은 각 지방으로 연결되는 요충지이며, 요즘의 지방철도청과 같은 기능을 가진 장수도(長水道)가 있을 정도로 부산과 경주, 경주에서 한양(漢陽)[서울]에 이르는 염지통(鹽之通)의 중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통수단이 불편한 당시 사회에서 하루 만에 공급이 가능한 지역은 바로 영천장이기 때문에 동해안 일대에서 수급되는 어류는 이곳 시장에서 군위·의성·안동·칠곡·선산·달성·경산 방면으로 출하되었으며, 또한 이들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면직품·약초 등이 동해안으로 매출되었다고 한다.

“잘 가는 말도 영천장, 못 가는 말도 영천장”이란 속담이 있다. 이 말은 위의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한다. 인근 각 고을에서 아무리 빨리 가도 영천시장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빨리 가 보아도 영천시장에서 만날 것이라는, 무딘 말[馬]을 가진 사람이 자위하는 넋두리일 것이다. 그러니까 경상도 남단의 모든 상거래는 이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영천 지방이 시장으로 번창한 또 하나의 이유는 농산물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금호강(琴湖江) 원류의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주곡과 산지에서 생산되는 과실과 약초는 전국으로 공급하였다. 특히 봉밀(蜂蜜)·완초(莞草)·인삼(人蔘)·유지(油紙)·송이·대마(大麻)·산약(山藥) 등은 특산물로 지목될 정도로 많이 생산되었음이 『영양지』에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고대에는 이곳에서 인삼까지 재배할 정도였으니, 약초의 산지로는 더욱 유명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인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약초이고 보니, 자연히 대구 약시장은 물론 전국으로 공급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울러 근대의 전문적이고 조직적인 시장 기능과는 달리 물물교환이 성행하였으니, 상품은 많고 거래 교환 장소는 넓어 더욱 방대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영천시장의 장소를 살펴보기로 하자. 문헌이나 구전에 의하면, 조선 중·후기에는 남천(南川) 변에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은 주택이 밀집되어 있는 완산 동쪽 강변 구릉지라 믿어진다. 그러던 것이 일제 강점기에 구 경찰서 일대로 이전되었으며, 다시 염매시장에서 향교 앞으로 이르는 지역으로 옮겨졌다. 그 후 인구가 증가하고 생활이 복잡해짐에 따라 장소가 좁고 기능이 원활하게 움직일 수 없어 1955년 현 공설시장으로 옮겨진 것이다.

한편, 영천 큰장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우시장(牛市場)은 처음에는 영천여자고등학교 후문 건너편, 속칭 구터에 있었다가 서문통 영양주유소 일대로 옮겨졌다. 그 후 다시 영동교에서 시장 쪽으로 1백 미터쯤 들어오는 왼편[완산동]으로 옮겨졌다가 1970년 야사동 장애인종합복지관 인근으로 옮겼으며, 1995년 10월 작산동으로 이전했다. 이렇게 전전한 우시장에는 영천뿐 아니라 당시 밤낮으로 편도가 가능한 지역은 모두가 몰려들었다.

[영천의 봉수대]

오늘날처럼 통신이 발달되기 전에는 횃불과 연기로써 변경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이나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방법으로 봉수(烽燧)가 있었다. 봉수는 군사상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신호 방법은 10리 혹은 수십 리마다 높은 산봉우리에 봉화대[인대]를 설치하여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하였다.

동양에는 물론 서양에서도 고대 사회에서 사용되었으며, 영천은 소산·여음현·성황당·구토현·방산 봉수대 등이 있는 지역으로, 예로부터 통신의 주요한 길목에 위치하였다.

1. 봉수대의 유래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통신 방법으로 봉수대를 설치하여 이용했는데, 정식으로 제정하여 실시한 것은 1149년(고려 의종 3)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던 조진약(曺晉若)의 건의에 의하여 만들어져 조선 시대에까지 계승되었다.

통신 방법은, 평상시에는 한 번씩 연기나 횃불을 올리고, 적이 나타나면 2번, 가까이 오면 3번, 외적이 국경을 침범하면 4번, 싸움이 벌어지면 5번씩 신호하여 변경으로부터 차례로 서울로 연락하였다.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연기나 횃불이 통하지 않을 때는 봉수군[봉수대를 지키는 사람]이 차례로 달려가서 전하였다.

중앙에서는 병조가 이를 주관하여 계속 상태를 파악하여 다음날 일찍이 승정원(承政院)[왕의 비서 기관]에 보고하고, 만일 사태가 위급하면 한밤중이라도 왕에게 보고해야 하며, 지방에서는 오장[지금의 분대장]이 관할하고 진장[국경 지방을 지키는 부대장]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2. 봉수망의 조직과 시설

봉수의 중요 선은 직봉(直烽)이라는 간선이 동북으로는 함경북도의 경흥(慶興), 동남은 부산의 동래(東萊), 서북은 내륙 지방의 강계(江界)와 해안 지방의 의주(義州), 서남으로는 전라남도의 순천(順天) 등 다섯 개 장소를 기점으로 하여 모두 서울의 목멱산(木覓山)[현 남산]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간봉(間烽)이라는 보조선이 있으니, 그 가운데는 직봉 사이의 중간 지역을 연락하는 장거리의 것도 있고, 특히 국경 방면의 전선 초소로부터 본진에 보고하는 단거리의 것 등 24간봉이 있었다.

대체로 봉수의 기점에서 서울 남산에 도착되는 소요 시간을, 평상시에는 12시간이 초과하지 않은 듯하다. 물론 유사시에는 변란에 따라 그 시각이 달랐다. 각 봉수에서 봉화를 올리는 시각과 서울 도착 시간이 일정했으므로, 봉수군들은 봉수대에서 종일토록 봉화 관찰에 힘쓸 것 없이 대개 정해진 시각의 전후에만 관찰하면 충분하였을 것이다.

즉 평상시에는 한 번씩 연기나 횃불을 올려놓으면 되었으므로, 태평한 날이 계속되면 책임을 추궁당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각 봉수대에서 망보는 일을 게을리하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에 갑자기 변란이 일어나면 봉수 체제는 위급한 임무를 다할 수 없어서 그동안 힘들여 유치하던 봉수 조직망은 쓸모없이 되어 버려서 곤란한 때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1447년(세종 29)에 정식으로 봉수제도를 마련하여, 변방 지역에서 봉화대를 쌓아 외적의 침입을 막았다. 봉화대의 규모는 높이 8m, 둘레 23m, 봉화대 밑의 네 면의 길이 각 10m였다. 그 바깥에 깊이와 너비 각 3m의 참호[진지용 구덩]를 둘레에 팠으며, 위를 뾰족하게 다듬은 길이 1m의 말뚝 지대를 만들었다. 봉화대 위에는 건물을 만들어 화기 등 각종 무기와 일상생활 필수품을 간수하게 하였다.

한편, 내륙 지방 봉수에는 위험도가 변경 지방보다 적으므로 봉화대를 쌓지 않고 아궁이만을 설치하였고, 변방 것처럼 쌓은 곳도 있었다. 내륙 지방 봉수의 아궁이는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크게 네모 또는 둥근 모양으로 만들었다. 높이는 3m를 넘지 않았고, 맹수의 침범 우려가 있는 곳은 둘레에 담장을 쌓았다. 성종 이후 에는 모든 봉수에 봉화대나 아궁이 위에 굴뚝을 만들어 비바람으로 연기나 불길이 흐르지 않도록 하였다.

봉수 요원으로는 봉화군(烽火軍)과 오장(伍長) 및 오원(伍員)[분대원]이 있었다. 즉 봉화군은 밤낮으로 봉수대에서 망보는 일을 맡은 사람이고, 오장과 오원은 봉화군을 감시하는 감독자였다. 그 인원은 봉수대 규모에 따라 달랐으나 봉화군의 신분은 양반과 천인의 중간 지위이고, 오장은 갑사(甲士)[조선 시대 군인]였다.

봉화대에 배속되는 봉수군은 다른 군역에 종사할 수 없고 오직 망보는 일에만 전념토록 했으며, 봉수대 부근에서는 무당이나 토속에 대한 잡신 제사를 금하였다.

3. 영천 성황당 봉수대의 역할

영천 성황당 봉수대는 영천시 내와 금호읍 사이에 있는데, 영천시 내에서 대구로 향하여 1㎞쯤 지나면 속칭 땅고개 못 미쳐 오른쪽으로 유달리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두 개 보이는데, 북쪽에 위치한 봉우리가 구 봉수대이고, 금호읍 쪽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신 봉수대이다.

이 봉수대는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기점(起點)이 되는 중요 역할을 하였다. 즉 부산 동래에서 서울로 가는 직봉으로, 울산과 경주로 연결되어 영천에서 신녕·군위·의성·안동으로 연결시키고, 또 하나는 웅천에서 시작해서 김해·밀양·청도·대구·경산·하양을 거쳐 영천에서 접수하여 다시 신녕·군위·의성·안동으로 연결되는 기점이 되는 중요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경상도 지방의 봉수망 지도를 보아도 성황당 봉수대의 중요성이 인식되며, 영천은 예나 지금이나 군사상으로 요충 지대이며 교통의 요지이다.

1) 영천 지역의 봉수망

방산(方山)[현 북안면 임포리]~소산(蘇山)[현 고경면]~성황당(城隍堂)[현 쌍계동]~성산(城山)[현 청통면 신덕리]~구도현(仇道峴)[현 청통면 계지리]~여음현(餘音峴)~의흥(義興)

2) 영천 지역의 봉수대

(1) 성황당(城隍堂) 구(舊) 봉수대[쌍계동 봉수대]

위치 : 영천시 쌍계동

크기 : 연대 둘레 100m, 높이 1.2m

재료 : 토석(土石) 혼용

시대 : 조선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1993년 12월 12일 표석을 설치하였다. 남쪽으로는 방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성산 봉수에 응했다. 후에 금호읍 신 봉수대로 옮겨지지만 이전에 따른 문헌상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2) 성황당(城隍堂) 신(新) 봉수대

위치 : 영천시 금호읍 원제리

크기 : 연대 둘레 100m, 높이 1.0m

재료 : 토석(土石) 혼용

시대 : 조선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1999년 6월 7일 표석을 설치하였다. 남쪽으로는 방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성산 봉수에 응했다 한다.

(3) 방산(方山) 봉수대[영계 방산(永溪方山) 봉수대]

위치 : 영천시 북안면 임포리 산 19-1번지

크기 : 둘레 11m, 높이 1.5m, 외곽 석축[방호벽] 300m

재료 : 토석(土石) 혼용

시대 : 조선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1994년 3월 14일에 표석을 설치하였다. 남쪽으로는 경주 주사봉 봉수[오봉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성황당 봉수에 응했다.

(4) 성산(城山) 봉수대[신덕 봉수대]

위치 : 영천시 청통면 신덕리

크기 : 연대 둘레 100m, 높이 2.0m

재료 : 토석(土石) 혼용

시대 : 조선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1994년 11월 23일에 표석을 설치하였다. 남쪽으로는 성황당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구토현 봉수[청통면 계지리]에 응했다.

(5) 구토현(仇吐峴) 봉수대[계지리 봉수대]

위치 : 영천시 청통면 계지리

크기 : 연대 둘레 70m, 높이 1.0m

재료 : 토석(土石) 혼용

시대 : 조선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1994년 12월 12일에 표석을 설치하였다. 남쪽으로는 성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여음동 봉수[신녕면 부산리]에 응했다.

(6) 여음동(餘音洞) 봉수대[부산동 봉수대]

위치 : 영천시 신녕면 부산리

크기 : 연대 둘레 234m, 높이 3.6m

재료 : 토석(土石) 혼용

시대 : 조선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1994년 1월 9일에 표석을 설치하였다. 남쪽으로는 구토현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토을산 봉수[군위군 의흥면]에 응했다.

(7) 소산(所山, 蘇山) 봉수대

위치 : 영천시 고경면 파계리 무학산

크기 : 연대 둘레 150m, 높이 1.0m

재료 : 토석(土石) 혼용

시대 : 조선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1995년 1월 8일에 표석을 설치하였다. 동쪽으로 응하는 봉수대는 알 수 없으며, 서쪽으로는 성황당 봉수[쌍계동]에 응했다.

(8) 봉화현(烽火峴)

위치 : 신녕면 부산리

자세한 내용은 불명이다.

[사통팔달 영남의 관문]

인간의 생활 영역에서는 필연적으로 교통 문제가 수반된다. 그러나 삼국 시대에 관한 도로망의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므로 영천 지방에 관한 사료도 있을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 지리지 말미에 동해통(東海通)·북해통(北海通)·염지통(塩地通)·해남통(海南通)·북료통(北僚通)의 다섯 통문과 건문역(乾門驛)·감문역(坎門驛)·곤문역(坤門驛)·간문역(艮門驛)·태문역(兌門驛) 등 다섯 문역의 명칭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5문역과 5문통을 통해 교통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믿어진다.

염지통은 정북방을 나타내는 감문역이 출발 지점이므로 골화고국(骨火古國)[영천]을 거쳐 조문고국(召文古國)[의성], 고타야군(古陀耶郡)[안동], 나기군(奈己郡)을 지나 중원(中原)[충주], 북원(北原)[원주], 한산(漢山)[경기도 광주]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천은 삭주(朔州)와 한주(漢州)의 북방 방위 최일선까지 연결되는 국토의 동편, 남북을 횡단하는 중요 지점이며, 북료통이 압독(押督)[경산], 달구벌(達句伐)[대구], 사벌(沙伐)[상주]로 연결되는 통로라면 이미 그 당시부터 영천과 대구는 간선 통로가 연결된 교통 중심지였음이 추측된다.

더욱이 고대 사회에서는 운하의 교통이 성행했으므로 금호강(琴湖江)의 원류가 되는 이곳은 소규모의 수상(水上) 교통도 가능했을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국가의 제도에 의하여 도로망이 질서와 계통을 가지고 편성되었다. 물론 신라 시대부터 중국의 영향을 받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조직화되었다는 뜻이다. 이때는 이른바 역참(驛站)이란 기관을 두어 주로 국가의 공문 전달, 관물의 운송, 공무를 띤 출장 관리의 숙박 등에 편의를 주는 것이었다.

『고려사(高麗史)』 병지 참역조에 의하면, 전국에는 22개의 도로에 252개의 역이 있었다. 역은 병부(兵部)의 관할로, 역장(驛長)과 역리(驛吏), 역정(驛丁)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또한 도로는 대로(大路)와 중로, 소로로 구분하여 중요성을 나타냈다.

영천 지방은 남으로는 경주도와 연결되며, 북으로는 상주도와 평구도로 이어지고, 간선으로는 경산과 대구로 이어지는 교통 중심지이다. 당시의 운영 상태를 살펴보면, 역원은 업무량에 따라 1등급은 70명 이상, 적은 곳은 6명에 이르며, 운영 경비는 국가에서 토지가 지급되었다.

여기에서 공수전은 역의 일반 경비에, 지전은 행정에 필요한 지필묵의 경비에, 장전은 역장의 수당에 충당되었다. 또한 역원의 가족은 역호라 하여 노역을 전담하였으며, 한 무리 촌락을 이루어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교통 제도가 더욱 세밀화되었다. 고려 시대에 22개 방면 500개소의 역이었던 것이 조선 시대에는 40개 방면 540개의 역으로 증설되었다. 당시의 교통 수단으로는 사람은 기마(騎馬)와 교자(轎子)를 사용하였고, 화물은 대차(大車)와 편차(便車), 곡차(曲車) 등을 사용하였다.

도로의 거리 표시는 6척(尺)을 1보(步)로, 360보를 1리(里), 30리를 1식(息)으로 하였으며, 도로의 폭은 대로가 56척, 중로가 16척, 소로가 11척으로 되어 있었다.

역마를 이용하려면 병부에서 인정한 말이 조각되어 있는 내용의 마패(馬牌)를 상서원(尙瑞院)에서 발급받아야 한다. 그리고 역에만 준하는 특별한 행정구역을 만들었는데, 근대의 지방철도청과 같은 찰방(察訪)의 감독하에 역이 있고, 역장과 역리, 역졸 등의 종사원이 있었다.

영천 지방에는 장수도 찰방(長水道察訪)[신녕]이 있었고, 예속 역으로는 영천 청통(淸通)·청경(淸景), 경주 아화(阿火)·모량(毛良)·사리(沙里)·구어(仇於)·의곡(義谷)·인비(仁庇)·경(鏡)·조(朝), 하양 화양(華陽), 자인 산역(山驛), 울산 부평(富平), 의흥 우곡(牛谷) 등의 역이 있었다.

한편 영천 경유의 중요 교통망은 경성(京城)~충주(忠州)~문경(聞慶)~유곡(幽谷)~상주(尙州)~대구(大丘)~밀양(密陽)~양산(梁山)~동래(東萊)로 연결되고, 유곡과 상주 사이에서 영천(永川)~경주(慶州)~울산(蔚山)으로, 영천과 경주 사이에서 언양(彦陽)~흥해(興海)~영일(迎日)로 연결되었다.

이렇듯 역이 통신과 운수의 기능을 병행하다가 1597년(선조 30)부터는 통신망을 전담하는 파발(擺撥)제도가 생겨 급속한 전달을 수행했다. 파발은 기발(騎撥)과 보발(步撥)이 있는데, 기발은 25리마다 1참(站)을 두었고, 보발은 30리마다 1참을 두었으며, 모든 참에는 발장(撥將) 1명, 군정(軍丁) 약간 명이 있었다.

영천 지방은 남해안을 연결하는 중요 지점이므로 반드시 참이 있었을 것이나 정확한 장소는 알 길이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모든 교통 시설은 국가 공용 여행자의 전용이었으므로 이들의 숙식과 편의를 위해 군(郡)과 현(縣)에는 객사(客舍)인 관(館) 이외에도 각 요로에 원(院)을 두었다.

영천 지방에는 제천원(濟川院)[도동], 남정원(南亭院)[작산동], 요간원(要看院)[북안], 임하원(臨河院)[북안], 적율원(赤栗院)[고경], 오읍포원(烏邑浦院)[고경면 단포], 신원(新院)[고경면 석계], 요광원(要光院)[자양], 보통원(普通院)[대전동], 길상원(吉祥院)[호당], 시천원(匙川院)[와촌], 영등원(永登院)[대천], 신원(新院)[청통], 양지원(陽地院)[화산], 갑현원(甲峴院)[신녕] 등이 있었다.

이러한 원은 사용자가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소멸되어 일반 여행자의 주막으로 변하였다.

한편,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우리나라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일본의 의도대로 진행되었으나 정치·사회·문화·산업 전반에 걸쳐 대단한 개혁이 단행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갑오경장 전에 1884년(고종 21) 근대 우정국(郵政局)이 탄생되고, 1886년에는 당시까지 운영되었던 각 지방의 찰방과 역이 폐지 공고되었다. 이러한 국가 시책에 의하여 영천 지방에도 1905년 5월 23일 처음으로 내동면 창구동에 임시 우체소가 개설되었으며, 1923년 3월 1일에는 영천우편소로 개칭되면서 전화 교환 업무를 취급하여 비로소 근대 전신문화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영천우편소는 1940년 과전동 100번지로 신축 이전하였으나 1946년 10·1 사건으로 소실되고 그해 11월 8일 창구동 7번지[현 영천시 정신보건센터 자리]로 이전하였다. 1959년에 완산동 1056-4번지[현 경희한의원 자리]로 신축 이전하였고, 1986년 8월 14일 완산동 928-25로 청사를 개축하여 이전하였다.

철도는 1905년 일본에 의해 경부선이 개통되고, 1914년에는 대구선이 개통되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이정표를 만들어 놓고 승객들의 편의를 도모하였으나 1938년 9월 10일 영천시 도동 120번지에 역사가 신축된 후 조직적인 업무가 시작되었다. 당시의 철도는 현재처럼 중심지를 경유하지 않고 도동 철교 부근의 역에서 도남동 북쪽과 작산동을 경유하여 북안면 송포리에 연결되었다.

그 후 1914년 3월 1일 완산동 930번지 현재의 역사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듬해 4월 1일 중앙선이 완전 개통된 후부터는 경부선과 중앙선이 연결되는 남부 지방의 교통 요충지가 되었다.

경북 영천과 상주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2008년 12월 29일 발표됨에 따라 이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경부고속도로에 집중된 교통량이 분산되고 지역의 균형개발도 촉진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영천과 상주 지역은 이미 개통된 다른 고속도로와 연계돼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로 부상할 전망이며, 특히 영천은 기존의 경부고속도로와 대구포항고속도로에 이어 사통팔달 교통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기대된다.

기획재정부와 경상북도에 따르면 영천상주고속도로는 2014년까지 영천시 북안면과 상주시 낙동면을 연결하는 총연장 93.9㎞로 건설된다. 당초 이 고속도로는 2009년 7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2014년 6월 완공 예정으로 왕복 4차로로 건설될 예정이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개통은 많이 늦어질 것으로 보인다.

영천상주고속도로가 개통되면 기존 국도를 이용하는 것보다 거리가 25㎞ 단축되고, 많은 일자리도 창출돼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이 고속도로는 대구권을 우회해 인근 다섯 개 고속도로를 연결함으로써 경부고속도로 대구 구간의 교통 체증이 해소되고 영천과 상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균형 개발도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상주청원고속도로가 개통된 상주와 경부고속도로와 대구포항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영천 지역은 이번 고속도로 건설로 교통 중심지로 떠오르게 됐다.

[교통 거점 영천의 문화와 미래 가치]

역참과 봉수대, 도로와 철도, 시장 등 영천은 다양한 부분에서 교통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옛날만큼의 모습은 아니지만 영천시장은 아직도 여전히 한약 집산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소머리국밥’과 ‘돔배기’를 대표 상품으로 재래시장의 기능을 충실히 소화하고 있다. 또 쌍계동 성황당 봉수대소산·신덕·성산·구토현 등 봉수대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영천은 조선통신사 관련 국내 유적지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이다. 대일본 사행문학(使行文學)의 길을 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고장이자, 부산과 더불어 전별연(餞別宴)이 유일하게 개최된 곳으로, 일본 최고 집권자에게 보이던 마상재(馬上才)를 미리 시연했고, 통신사와 지역을 대표하는 문사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던 곳이었다.

그 동안 영천은 조선통신사의 맥이 흐르는 고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몇 년 전 조양각(朝陽閣)을 전면 해체하여 재복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지역민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열의와 긍지는 앞으로 통신사와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의 발굴 및 보존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천 남천강변에서 마상재가 재현될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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