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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489
한자 古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이영호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신라 멸망까지의 역사.

[개설]

영천 지역은 삼한 시대에 소국인 골벌국(骨伐國)을 형성하였다가 신라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교통과 군사의 요지로서 중요시되면서 발전하여 왔다.

[연혁]

1. 선사

영천 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자취는 이 지역에 산재한 많은 유적과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화산면 연계리금호읍 어은리 등에서 발견된 각종 청동 제품은 이미 이 시기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청동기 문화의 진전에 따라 사회가 분화되었던 사실은 임고면 양평리대창면 조곡리, 자양면 용산리 등에 있는 고인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2. 삼한 시대

영천 지역에서 성장한 소국(小國)으로 확실한 것은 골벌국(骨伐國)이다. 골벌국골화국(骨火國)·골벌소국(骨伐小國)·골화소국(骨火小國) 등으로도 불렸으며, 오늘날의 영천시 완산동북안면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삼국 시대

『삼국사기』 권34, 지리지에는 신라 조분왕골화소국(骨火小國)을 쳐서 멸망시켜 현(縣)으로 삼았다고 하고, 신라본기 권2의 236년(조분왕 7) 2월조에는 골벌국왕 아음부(阿音夫)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이에 왕이 집과 토지를 주어 편히 살게 하고 그 지방을 군(郡)으로 삼았다고 한다.

신라의 팽창에 따라 그 인근에 위치한 골벌국은 비교적 일찍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하겠다. 골벌국은 뒷날 절야화군[切也火郡, 지금의 영천]사정화현(史丁火縣)으로 개편되었는데, 군과 현이 6~7세기경에 나타난다는 사실에서 그 대략적인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삼국 시대 영천 지역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청제(靑堤)의 축조와 이를 기록한 청제비이다. 531년(신라 법흥왕 18)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한 사실이 있는데, 청제비의 건립 연대는 그 직후인 536년(법흥왕 23)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제비의 존재는 이 시기 사회의 발전에 따른 농업의 중요성과 생산력의 증대 문제에 국가의 관심이 크게 경주되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 비석은 당시 축조한 저수지의 규모와 인력 동원 문제, 관등 문제 등 신라사의 이해에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 주었다. 그 뒤 이 저수지가 파손되었으므로 원성왕 때 다시 수축하였다. 그 뒷면에 기록된 비문에 의하면, 798년(원성왕 14) 2월 12일부터 4월 13일까지 공사를 한 사실과 축조 규모, 동원된 인력 등을 살필 수 있다.

4. 통일신라 시대

757년(경덕왕 16) 12월에 전국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개혁을 단행하였고, 이어 759년(경덕왕 18) 정월에는 관호(官號)마저 한자식으로 바꾸는 대규모 개혁이 있었다.

이 무렵 영천 지역은 절야화군(切也火郡)으로 불렸고, 5개의 영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 한자식으로 개명된 명칭은 절야화군에서 개명된 임고군(臨皐郡)·장진현(長鎭縣)·임천현(臨川縣)·도동현(道同縣)·신녕현(新寧縣)·민백현(黽白縣) 등이었다. 이 중 장진현은 오늘날에는 영천의 영역이 아니고, 경주 지역이다.

혜공왕은 774년(혜공왕 12) 정월에 관호에 대한 복고 조치를 단행하였으며, 영천 지역의 지명도 이때 같이 복고되었다고 판단된다. 사벌주가 이때 복고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지명은 이 두 가지 이름이 혼용된 듯하다.

절야화군[임고군]으로 불리던 영천 지역의 이름은 신라 말기에 고울부(高鬱府)로 개칭되었다. 그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신라 말기 새로운 지방 제도로서 부(府)의 탄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925년(고려 태조 8) 10월 고울부 장군 능문(能文)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에 투항한 사실과 927년(태조 10) 9월에 견훤이 신라의 고울부를 습격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적어도 이때는 고울부로 개편되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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