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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21
한자 秘密結社團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5년연표보기 - 영천 출신 조재만 비밀결사단 조직
전개 시기/일시 1926년 9월연표보기 - 비밀결사단원 조재만 이원록, 이정기 중국 답사, 귀국
전개 시기/일시 1926년 12월연표보기 - 비밀결사단원 조재만, 이원록 중국으로 출국
전개 시기/일시 1927년 10월 18일 - 비밀결사단원 장진홍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
전개 시기/일시 1927년 - 비밀결사단원 조재만과 이원록 귀국
성격 비밀결사
관련 인물/단체 이육사|조재만|이정기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조재만이 설립한 항일 비밀결사.

[개설]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출신의 조재만은 1922년 설립된 영천 백학학원(白鶴學院)에서 이원록(李源祿)을 만나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이원록은 1921년 영천군 화북면 오동리의 대지주 안용락(安庸洛)의 딸 안일양(安一陽)과 결혼하면서 백학학원에 다녔으며, 조재만은 1921년 대구에서 사립 교남학교(嶠南學校)를 다니다가 백학학원이 설립되자 3학년에 편입하여 이원록과 만나게 되었다.

조재만이원록백학학원의 교사 서만달 등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이원록백학학원을 졸업하고 백학학원의 강사를 거쳐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정치예비교와 일본대학 문과 전문부를 다니며, 무정부주의 단체 흑우회(黑友會)에서 활동하였다.

조재만은 대구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서울에 있는 휘문고보에 진학하였으나 친일교장배척사건에 연루되어 제적을 당했다.

[경과]

1925년 조재만이원록은 성주 출신의 이정기(李定基)를 만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단(秘密結社團)을 조직하였다. 조재만은 1925년 1월 일본에서 귀국한 이육사와 함께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때 성주 출신의 이정기를 만나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정기는 성주군 월항 출신으로 경상북도 유림이 주도한 파리장서의 최연소 서명자이다. 1926년 3월 조재만이원록, 그리고 이정기는 중국 북경 등지를 현지답사하고 그해 9월 귀국하였다.

1926년 12월 조재만이원록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거의 1년간 당시 중국 정부의 군사고문관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이완 장군의 집에 기거하면서 국민당정의부위원(國民黨正義府委員) 남형우(南亨祐), 대한독립당군정서(大韓獨立黨軍政署) 대표 배병현(裵炳鉉), 의열단(義烈團) 김창숙(金昌淑) 등과 접촉하면서 중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독립운동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1927년 가을 조재만이원록은 중국에 한인군관학교를 설립할 자금 모금을 위해 귀국하였고, 10월 18일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의거가 일어났다. 장진홍 의거에 연루된 조재만은 서울에서 체포되었고, 이원록은 대구에서 체포되었다.

[결과]

조재만이원록은 2년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탄압을 당했다. 이때 조재만의 수인 번호는 608번이었고, 이원록의 수인 번호는 264번이었다. 조재만이원록은 출옥 후인 1931년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다시 북경으로 갔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 이후 조재만은 귀국하였고, 이원록은 남경의 조선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제1기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군관학교 제2기생을 모집하여 보내라는 공작 임무를 띠고 국내로 들어왔다.

[의의와 평가]

영천 출신의 조재만을 비롯한 이원록·이정기·장진홍 등 9명이 대구에서 조직한 비밀결사단(秘密結社團)은 국외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항일독립운동단체였다. 이 단체에 속한 단원들은 군자금 모금과 의열 투쟁을 통해 국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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