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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정몽주유허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634
한자 圃隱鄭夢周遺墟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1044-5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정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337년 - 정몽주 출생
건립 시기/일시 1389년연표보기 - 포은정몽주유허비 건립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392년 - 정몽주 사망
보수|복원 시기/일시 1607년 - 포은정몽주유허비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1992년 7월 18일연표보기 - 포은정몽주유허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2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포은정몽주유허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현 소재지 포은정몽주유허비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1044-5번지 지도보기
성격 비|비각
양식 홑처마|팔작지붕
관련 인물 정몽주
재질 석재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문물|보호단위 등급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 있는 고려 후기 영천 지역의 문신인 정몽주(鄭夢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세운 효자비.

[개설]

정몽주[1337~1392]의 본관은 영일, 초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이며,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1355년 아버지 상(喪)에 3년, 1365년 어머니 상(喪)에 3년간 여묘(廬墓)하여 정표되었다.

정몽주는 1357년 과거에 합격한 후 예문검열(藝文檢閱) 등을 거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판도평의사사사(判都評議使司事) 병조상서시사兵曹尙瑞寺事 영경령전사(領景靈殿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에 제수되고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1367년 부사(副使) 이용(李容)과 함께 영천 금호강[남천]변에 명원루(明遠樓)[현 서세루(瑞世樓) 또는 조양각]를 창건했다. 1401년 태종 신사년(辛巳年)에 태종이 명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관대제학 겸예문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修文館大提學 兼藝文春秋館事) 익양부원군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431년 정몽주를 삼강행실도충신도에 그리고, 1517년 문묘(文廟)에 종사하고, 1554년 임고 서원(臨皐書院)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정몽주는 전국 20여 개 원사(院祠)에서 제향되고 있으며, 저서로는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있다.

[건립 경위]

포은정몽주유허비는 영천 출신 정몽주가 부모상에 각각 3년의 여묘를 지낸 것이 조정에 알려져 1389년(공양왕 원년)에 영천 군수 정유에 의해 정몽주가 태어난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 세워졌다.

그 후 잃어버렸던 것을 1487년(성종 18) 경상감사 손순효가 이곳에 순력 중 꿈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땅속에 묻혀있으니 꺼내 달라”는 꿈을 꾸고 다음날 땅속에서 찾아내 비각을 세워 현재까지 관리되고 있다. 비각은 1607년 중수가 된 후 최근에 다시 중건되었다.

[위치]

포은정몽주유허비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도로변에 있다. 우항리는 임고면소재지에서 포항시 기계면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자호천에 놓인 양수교를 지나자마자 나오는 우측의 농로를 따라 2㎞정도 가면 우항리 연하마을이 나온다. 비는 연하마을 남단에서 남서쪽 300m 지점의 밭 한 쪽에 세워진 비각 내에 있다.

[형태]

포은정몽주유허비는 방형의 토석 담장으로 둘러진 일곽 내에 단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비각 안에 있다. 비각은 일각문을 통해 드나들며, 담장 앞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비각은 외벌대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앉히고 원형기둥을 세워 비각을 완성했다.

기둥 상부는 아무런 꾸밈없이 단출한 몰익공 양식으로 처리했고 정면 상부에 현판을 걸었다. 벽은 사면 전체를 홍살벽으로 처리해 내부의 비가 잘 보이도록 했다. 내부에는 두 개의 기문이 걸려 있다. 비는 비각 중앙부에 자연석 비좌를 앉히고 평평하고 길쭉한 방형의 비신을 꽂고, 정면에 ‘효자리(孝子里)’라고 새겼다.

[금석문]

포은정몽주유허비는 비각의 정면 상부에는 가로로 ‘포은정선생지려(圃隱鄭先生之閭)’라고 새긴 현판이 걸려있고, 내부에는 만력삼십오년(萬曆三十五年)[1607년]에 쓴 중수 비각 기문과 가정사십삼년(嘉靖四十三年)[1564년]에 쓴 기문이 걸려 있다. 비의 정면에는 ‘효자리(孝子里)’라고 중앙부에 세로로 큼직하게 새기고 우측에 ‘공신 찬성사 대제학 정몽주(功臣贊成事大提學鄭夢周)’라고 세로로 새기고 그 좌측 ‘효자리’ 하부에 ‘경오 봉 익양군 충의군(庚午封益陽郡忠義君)’이라 세로 3열[각 열 세자]로 새겼다. 마지막으로 비의 좌측에는 ‘홍무 기사 삼월 ○○영수 정유 립비(洪武己巳三月○○永守鄭有立碑)’라고 새겨져 있어 1389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현황]

포은정몽주유허비는 근래에 비각과 주변 담장 등을 정비해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고 비의 받침[비좌]도 새로 다듬어 앉혔다. 비좌와 비신의 틈새는 시멘트 모르타르 찌꺼기가 있어 보기에 흉하다. 비명에는 붉은색으로 칠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1992년 7월 18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포은정몽주유허비는 영천 지역에서는 청제비 다음으로 오래된 비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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