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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225
한자 鄭允良
이칭/별칭 원좌(元佐),노촌(魯村)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전민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5년연표보기 - 정윤량 출생
몰년 시기/일시 1580년연표보기 - 정윤량 사망
출생지 정윤량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노항촌
묘소|단소 정윤량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하천재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묘소 아래지도보기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영일

[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가계]

정윤량(鄭允良)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원좌(元佐), 호는 노촌(魯村)이며, 1515년(중종 10) 현재의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노항촌(魯巷村)에서 태어나 1580년(선조 13)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영산 유학 교도(靈山儒學敎導) 정문예(鄭文裔)이고, 증조는 사성(司成) 정종소(鄭從韶)이며, 조부는 찰방(察訪) 정이휘(鄭以揮)이다. 아버지는 정차근(鄭次謹)이며, 어머니 벽진 이씨(碧珍李氏)는 장사랑(將仕郞) 이배원(李培源)의 딸이다. 첫째 부인 영양 최씨(永陽崔氏)는 봉사(奉事) 최덕금(崔德嶔)의 딸로, 슬하에 아들을 두니 증(贈) 병조 판서(兵曹判書) 정세아(鄭世雅)이다. 후일 둘째 부인을 얻었는데 역시 영양 최씨이다.

[활동 사항]

정윤량은 어려서부터 기량이 있었고,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약관에 도산(陶山)으로 가서 이황(李滉)에게 경의(經義)를 배우고, 같은 고을에 김응생(金應生)노수(盧遂)가 있어 서로 도의로서 사귀었고, 더불어 향리에 자양 서당(紫陽書堂)을 지어서 글을 읽으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임고 서원(臨皐書院)을 창건하여 정몽주(鄭夢周)를 향사함에 모두 스승 이황(李滉)에게 품의하여 시행하였으며, 장사랑(將仕郞) 창릉 참봉(昌陵參奉)을 지냈다.

정윤량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애통해 하는 모습이 더할 수 없이 애처로웠고 예를 행함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이윽고 묘 터를 잡아 장례를 치르는데, 백발 노승이 지나가면서, “정 효자 댁의 묘소를 어찌 이곳에 와 쓰는지 이상한 일이로다”하면서 중얼거리고 지나갔다. 이 말을 전해들은 정윤량은 부리나케 뒤를 쫓아 십 리를 가서 뜻밖에도 노승은 기다리고 있다가, “상주가 올 줄 알았다”면서 앞장서서 기룡산 기슭에 와서는 지팡이로 혈을 짚어 주며 “이 혈은 기룡의 좌장혈이오! 부귀를 겸하여 가운이 융성할 것이며 힘차게 내리 쏟는 기룡의 정기를 받았으니 위인이 날 징조라. 청룡과 백호가 세 겹으로 둘려졌으니 귀인이 날 터이며, 물 흐름이 보이지 않으니 부자도 날 것이요, 이와 같이 크고 귀한 판국에는 손세도 좋아 이 세상이 바로 정 효자요”하는 것이었다.

정윤량은 집으로 모셔 후히 대접할 양으로 소매를 끌었으나 노승은 사양하며, “나는 신령의 명을 받고 온 설학이오,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니 오늘은 길이 바빠서 곧 가야 하오.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라고는 기어이 떠났다. 정윤량이 날을 다시 받아 장사를 치르니 그곳이 바로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성곡리(聖谷里) 하천(夏泉)이었다 한다.

[묘소]

정윤량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하천(夏泉)에 있으며, 세마(洗馬) 이광정(李光庭)이 찬한 묘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묘소 아래 묘재인 하천재(夏泉齋)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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