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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437
한자 王平
이칭/별칭 광희(光熙),이응호(李應浩)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상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8년 3월 15일연표보기 - 왕평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7년 - 왕평 영천보통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24년 11월 - 왕평 조선배우학교 1기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37년~1938년 - 왕평 영화에 출현
몰년 시기/일시 1940년연표보기 - 왕평 사망
출생지 왕평 출생 -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
묘소 왕평 묘소 - 경상북도 청송구 파천면 송강리
성격 예술가
성별
대표 경력 황성옛터 작사가

[정의]

근대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예술가.

[개설]

왕평(王平)[1908년?~1940년]의 자는 광희(光熙), 본명은 이응호(李應浩)이며 이동암의 장남으로 경상북도 영천에서 출생했다. 일제 강점기에 연극·영화·대중가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예술인이다.

고학으로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배우학교 1기생으로 연기를 공부했으며, 일본의 포리돌 레코드사의 서울지사 초대 문예부장을 지냈다. 「황성옛터」·「대한팔경」·「비단장사 왕서방」 등 일제 강점기 때 민족의 애환을 담은 노랫말을 만들었다.

[활동 사항]

왕평은 영천에서 출생해서 5세부터 7세까지 청송군에서 살았으며, 묘소도 청송군 파천면에 있다고 전해지며, 이후의 성장 과정은 불분명하다. 왕평은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현철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의 제1기 입학생으로 들어가 연기를 공부했고, 배우뿐만 아니라 극작가와 대중가요 작사가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30년대 초에는 조선연극사의 전속 작가로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에는 포리돌 레코드의 조선지점 설립에 관여한 뒤 문예부장을 맡았다.

왕평은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트로트인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과 선우일선의 신민요 「조선팔경가」를 작사하기도 했으며, 1933년부터 8장이 발매된 인기 극반 「항구의 일야」도 유명하다. 「항구의 일야」는 왕평이 작품을 쓰고 전옥과 함께 주연을 맡기도 했다. 이때는 작가로서는 본명 이응호를, 배우로서는 예명 왕평을 사용했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성봉영화원에 들어가 「나그네」[1937]와 「군용열차」[1938]에 출연함으로써 영화계에도 데뷔했으며, 유랑극단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던 1940년에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연극 「남매」를 공연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져 30대 초반의 나이로 요절했다.

[저술 및 작품]

주요 작품으로는 「황성옛터」·「대한팔경」·「고도의 정한」·「비오는 포구」·「비단장사 왕서방」·「신아리랑」·「신쾌지나 칭칭」 등이 있는데 모두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애환과 혼을 불러일으켰던 기념비적인 노래다. 특히 「대한팔경」·「항구의 일야」는 조선인을 선동하는 노래라 하여 발표가 금지되기도 했다.

[묘소]

왕평의 묘소는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수정사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왕평을 추모하기 위해 영천시에서는 1996년 10월 시민의 날 행사 일환으로 제1회 왕평가요제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부터는 영천문화원이 주최하는 영천문화예술제의 공연 프로그램으로 영천연예협회가 기획 주관하였고 2011년에는 제16회 왕평가요제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2008년에는 왕평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콘텐츠의 구축을 위해 지역문화·예술의 발전과 전승을 통해 오랜 세월 묻혀 있던 그의 주옥같은 작품이 담겨있는 SP 유성기 음반을 찾아 디지털 음반인 「왕평선생 탄생 100주년 음반」을 제작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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