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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의 은혜 갚음으로 얻은 당지산의 명당」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2175
한자 -恩惠-唐旨山-明堂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6년 3월 13일 - 「자라의 은혜 갚음으로 얻은 당지산의 명당」 『대동일보』「우리 장의 전설」 제2화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2년 - 「자라의 은혜 갚음으로 얻은 당지산의 명당」 『영일정씨문헌록』에 「당산재기」라는 제목으로 수록
관련 지명 당지산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제리[고수곡] 155번지 지도보기
성격 설화|전설|보은담|풍수담
주요 등장 인물 사정공|사정공의 어머니|서당의 스승|자라수|자라
모티프 유형 보은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제리에 있는 당산재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자라의 은혜 갚음으로 얻은 당지산의 명당」은 어린 시절 정위(鄭瑋)가 큰 자라를 구해주고 그 은혜 갚음을 받아서 명당을 얻었다는 ‘보은’과 관련한 풍수담이다. 사정공(司正公) 정위는 판서공(判書公) 정광후(鄭光厚)의 장자로 관직으로는 돈용부위(敦勇副尉)·후령사정(後領司正) 등을 역임했다.

[채록/수집 상황]

1996년 3월 13일 『대동일보』 ‘우리 고장의 전설’ 제2화에 수록되었으며 2002년에는 『영일정씨문헌록(迎日鄭氏文獻錄)』에 이를 정리하여 「당산재기(唐山齋記)」라는 제목으로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영일 정씨 사정공 19세손 정민식(鄭旻植)의 구술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내용]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제리에는 사정공에 대한 자라의 은혜 갚음으로 당지산(唐旨山)의 명당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산재기」에 의하면 팔공산의 한 줄기가 동으로 약 50리에 이르면 당지산에 닿는다고 한다.

당지산은 ‘용이 꿈틀거리며 가는 모습과 봉황이 춤을 추는 형상’ 즉 ‘완연유약룡행봉무지상(蜿蜒有若龍行鳳舞之狀)’으로 산세가 수려하여 신령의 맑은 기운을 품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또 그 산 아래에는 당지(唐池)라고 불리는 못이 있어, 사람들은 이 산을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혈’ 즉 ‘갈마음수지국(渴馬飮水之局)’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려 말 높은 벼슬을 지낸 포은 정몽주의 재종 조부인 판서공 정광후이성계 일파로부터 신변의 위험을 느껴 이를 피해 영천의 전촌(錢村)으로 왔다. 야밤중에 남 몰래 식구들을 데리고 빈손으로 왔기 때문에 살림살이가 아주 어려웠다고 한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이 사정공이었다.

사정공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재주가 있어 글공부를 잘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가정 사정은 어려운 형편이지만 교육을 소홀히 할 수 없어 서당을 보내 공부하도록 하였다.

그 때의 풍습 중 책 한 권을 다 배우면 제자가 책거리 떡을 하여 스승에게 바치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는데 하루는 사정공이 어머니께 책 한 권을 다 배웠으니 책거리 떡을 해 주길 요청하였다. 그러나 워낙 가난하여 떡을 해줄 형편이 되지 못해서 다음 책을 다 배우면 떡을 해 주겠다라고 약속을 하였다. 그 뒤 두 번째 책을 떼고 나서 다시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으나 역시 대답은 같았다. 세 번째는 거절할 수가 없어 이웃에 가서 쌀을 빌려다 책거리 떡을 만들어 아들에게 주었다.

사정공은 신나는 마음으로 떡 그릇을 들고 서당으로 가는 도중에 자라를 파는 장수를 만났다. 어떤 사람과 한창 흥정을 하고 있는데 여러 마리의 자라 중에 한 마리의 자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정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니 팔려갈 자라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자라 파는 장수에게 자신이 들고 있는 떡을 다 줄 것이니 자라와 바꾸자고 제안을 하였다. 자라 주인도 귀한 떡이라 좋다하고 자라를 주었다.

사정공은 떡과 바꾼 그 자라들을 가까운 물 속에 모두 놓아주었다. 눈물을 흘리던 자라는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결국 스승의 은혜보다 팔려가 죽을 자라를 살려주는 생명을 존중한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어머니이신 익양군부인 영천 이씨가 돌아가시자 묘터를 찾아 여기 저기 다니다가 당지산 근처에 가니 큰 자라 한 마리가 사정공의 앞길에 기어가기에 이상히 여겨 따라가 보니 언덕으로 올라가 양지 바른 곳에 멈추어 섰다. 그 자리에 서서 산세를 살펴보니 명당으로 생각되었고, 그래서 그 곳에 어머니의 묘를 섰다고 한다. 그 후에 자라를 살려준 사정공 내외의 묘소도 그 곳에 섰다.

그 이후 그의 자손 양대에서 문과 8급제가 나서 세상에 가문의 명성을 날렸고, 약 600여년을 내려오며 자손은 수 천호에 이르고, 벼슬길에도 그 명성이 이어졌다. 또한 효도와 우애·문행과 훈공이 이어지고 있다.

결국 자라가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보은(報恩)으로 묘터를 명당에 점지해 주었던 것이다. 생명을 존중한 사정공의 사상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되어 그의 자손들도 자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당지산 중원에 여러 봉의 묘소가 있는데 판서공과 익양군부인 영천 이씨의 묘소가 수위(首位)이고, 그 장자인 사정공의 묘소와 그의 부인인 대구 서씨의 묘소가 다 같은 언덕에 있다.

[모티프 분석]

「자라의 은혜 갚음으로 얻은 당지산의 명당」의 주요 모티프는 ‘보은’과 ‘명당’이다. 선한 일에 대한 보답으로 명당을 부여받고 자손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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