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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2311
한자 鄭島榮
이칭/별칭 수용(鄭壽容),화일(華一),백파(白坡),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전민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1년 9월연표보기 - 정도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정도영 기미 독립 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79년 6월 20일연표보기 - 정도영 사망
출생지 정도영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정도영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영일

[정의]

근현대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문인.

[개설]

고려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는 영일 정씨(迎日 鄭氏)는 문과 급제 후 봉익대부행전공판서(奉翊大夫行典工判書)인 정인언(鄭仁彦)과 그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정광후(鄭光厚)부터 영천 전촌(錢村)에 옮겨 살았다.

[가계]

정도영(鄭島榮)의 본관은 영일. 초명(初名)은 수용(壽容)이고, 자는 화일(華一), 호는 백파(白坡)이다. 1901년(고종 38) 9월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에서 태어나 1979년 윤 6월 20일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정신재(鄭信在)이며, 증조는 정진억(鄭鎭億), 조부는 정태원(鄭泰源)이다. 부친은 성균생원(成均生員) 정동기(鄭東驥)이며, 모친은 문소 김씨(聞韶 金氏)로 김무락(金武洛)의 딸이다.

처는 진성 이씨(眞城 李氏)로 이상호(李尙鎬)의 딸이며, 슬하에 2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정기홍(鄭起洪)과 정기엽(鄭起燁), 사위는 권대형(權大衡)과 김세한(金世漢)이다.

[활동 사항]

정도영은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워 신동이라 칭송을 받았으며, 아버지와 장인의 시에 화답하니 더욱 큰 기대를 받았다.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단발하고 중동학교(中東學校)에 들어갔다가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로 전학하였지만 아버지의 엄명으로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오게 되었다.

1919년 서울에 있을 때 기미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이후 신간회(新幹會)가 설립되자 참여하였으니 늘 일경(日警)의 사찰대상이었다.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사찰이 극심해지자 예불(禮佛)을 핑계로 명산을 왕래하며 몰래 동지들을 방문하여 시사(時事)를 탐문하며 규합에 앞장섰다.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분단으로 인한 좌우 다툼을 늘 안타깝게 여겼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에 피선되었지만 국정이 더욱 혼란스러워진 1950년에 이르러 시 3편을 지어 자신의 뜻을 밝히고 호연하게 향읍(鄕邑)으로 돌아왔다.

정도영은 인륜이 무너짐을 애석하게 여기고 풍속을 두터이 하고 백성을 교화시킬 만한 일을 만나면 솔선하여 행하였다. 무너져 황폐해진 향교를 다시 새롭게 하였으며, 임고 서원(臨皐書院)과 도동 서원(道東書院) 등 여러 서원의 원장을 역임하면서 유풍을 진작시키고, 서사(書史)를 연구하고 풍월을 읊조리며 여생을 마쳤다.

정부에서 일찍이 무궁화국민훈장(無窮花國民勳章)을 서훈하였지만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고을 사람들이 정도영을 위해 모임을 만들어 ‘역열(亦悅)’이라 이름하였다.

[묘소]

정도영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고부랑곡(高富郞谷) 유좌(酉坐)이며, 여주(驪州) 이우성(李佑成)의 갈문(碣文)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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