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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중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노계 박인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018
한자 盤中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蘆溪 朴仁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원석

[개설]

박인로(朴仁老)[1561~1642]는 경상북도 영천 출신으로, 가사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 무인 겸 문인가객이다. 본관은 밀양이며,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이다.

그의 생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초반에는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고, 후반에는 독서와 수행으로 초연했던 선비와 문인 가객으로서의 면모가 지배적이다.

훌륭한 가문에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독실근학(篤實勤學)하여 열세 살에 「대승음(戴勝吟)」이란 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으나, 출세 영달에는 뜻을 두지 않고 가난한 선비로서 안빈낙도하며 인격을 수양하고 인간의 정도를 추구하며 살았다.

[노계 박인로의 생애]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는 동갑 나이에 교분이 두터운 사이로 벼슬길의 기회도 있었으나, 세속의 명리에 연연하지 않고 성경충효(誠敬忠孝)를 덕목으로 삼아 성실궁행(誠實躬行)하여 사람을 대함에 공경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하며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의 도리를 실천하였다.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주경야독하여 정신을 수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사람을 사귐에 공경과 정성을 다하였다. 한음 이덕형을 비롯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등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고, 선유(先儒)의 유적을 찾아 현철(賢哲)이 걸어간 길을 답습하며 사상과 덕행을 따르고자 노력하였다.

1612년(광해군 4)에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아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유풍(儒風)에 감명받은 나머지, 한밤중에 일어나 분향축천(焚香祝天)하며 성현을 추모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찾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추모하여 「독락당(獨樂堂)」이라는 가사를 지었다.

청백리로서 조라포만호(助羅浦萬戶) 직에 있을 때 선정을 베풀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폐의파립(敝衣破笠)[해진 옷과 부러진 갓이란 뜻으로, 너절하고 구차한 차림새를 말함]이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주민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선생의 공을 기렸다.

재상인 이덕형이 노닐었던 전원인 용진강(龍津江) 사제(莎堤)를 찾아가 지은 「사제곡(莎堤曲)」이나 한강 정구와 함께 울산초정(蔚山椒井)에 가서 지은 「초정가(椒井歌)」, 그리고 여헌 장현광과 입암(立巖)에 노닐면서 지은 「입암별곡(立巖別曲)」과 「입암이십구곡(立巖二十九曲)」 등은 박인로의 학문과 인격이 일세를 풍미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 되겠다.

박인로는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너무나 지극하여, 살아 계실 때에는 지성껏 봉양하였고, 돌아가신 후에는 3년 동안 여막(廬幕) 생활로 예를 다하였다. 그의 효심은 「오륜가(五倫歌)」와 「조홍시가(早紅柿歌)」에 잘 나타나 있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노계 박인로의 대표작인 「조홍시가(早紅柿歌)」는 1600년(선조 33)이나 1601년에 지은 시조로 추정되는데, 박인로가 성리학을 배우기 위해 장현광을 찾아갔을 때 홍시[붉은 감]를 대접하고 그를 소재로 시조를 지어보라 하여 지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박인로가 이덕형을 찾았을 때 대접하기 위해 내어놓은 홍시를 보고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신 어버이를 그리워하며 다하지 못한 효성이 불현듯 생각나서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덕형이 이미 지어진 「조홍시가(早紅柿歌)」를 보고 박인로에게 단가(短歌) 세 수를 짓게 하였고, 그후 『노계선생문집』을 간행하면서 4수를 묶어 「조홍시가」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혼란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한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 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세 글로 설워하나이다

중국 삼국 시대 오군인(吳郡人)으로 여섯 살 난 육적(陸積)이 스승인 애술(哀術)을 찾았을 때, 대접으로 귤 몇 알을 내놓았다. 선생이 잠시 없는 틈을 타서 어머님을 봉양하고픈 생각이 불현듯 들어 귤을 품에 품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 앞에 하직인사를 하려 하자 그 귤이 쏟아져 나왔다. 스승 애술이 왜 먹지 않고 품에 품었냐고 물으니,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고사를 인용한 내용으로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애국애족하는 우국지심(憂國之心)은, 임진왜란을 당하매 의병에 참가하여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아갔으니 「태평사(太平詞)」와 「선상탄(船上歎)」을 통하여 잘 표출되어 있다. 이러한 선생을 가리켜 여헌 장현광은 늙음을 모르고 발분망식(發憤忘食)하며, 학문에 힘쓰는 ‘동방의 인호(人豪)’라고 칭송하였고, 안찰사로 내려온 이명(李溟)은 ’독행지립지사(獨行特立之士)‘로 계(啓)를 올려 인조 임금이 쌀과 고기를 하사하고 후손들을 돌보라고 명하기도 했다.

[노계 박인로의 작품]

『노계집(蘆溪集)』 3권 2책에 수록된 가사문학 9편과 시조 67수 등 노계 박인로의 주옥 같은 작품을 보면, 신기(神氣)나 가식(假飾)을 좇지 않고, 질박(質朴)하고 힘차며, 소박하고 서민적이어서 그 인간적 면모가 여실히 잘 나타나 있다.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가치가 더욱 인정되어, 세인(世人)의 가슴속에 빛과 향기로 스며들게 하고 있다.

그의 삶은 「누항사(陋巷詞)」에서 보듯이, 가난하고 소박한 생애였으나, 작품 활동은 작고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국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있다. 그의 문학적 인간적 발자취는 실로 이 나라 국문학사상 우뚝 솟아 장중하기가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다고 할 것이다.

[노계 박인로의 유적]

노계 박인로는 1642년(인조 21) 12월에 82세로 타계했다. 그로부터 60년 후 1701년(숙종 33)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는 유생들이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 서원을 세우고 도계서원(道溪書院)이라 칭하고, 유생 교육과 향사(享祀)를 올리며 추앙하고 있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0년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노계집(蘆溪集)』 판목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노계 박인로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유적으로는 현재 도계서원 경내에 문학박사 모산 심재완이 쓴 시비가 있고, 도계서원 옆에는 전국 국어국문학 시가 건립 동호회에서 세운 노계가비가 있다. 또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입암서원 앞에 윤해희 전 부산교육대학교 교수가 쓴 시비가 있으며,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 민락공원 무궁화동산에 부산 토향회에서 세운 가사비가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에는 영천 향토사 연구회에서 세운 유적지비가 있어 선생의 학덕과 충효사상을 경모하고 있다.

[노계 박인로를 기리기 위한 제언]

노계 박인로 선생이 돌아가신 지 370년이 흘렀다. 지금 노계 선생의 출생지 및 유적지인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를 찾아가 보면 선생의 묘소를 비롯하여 도계서원, 유물전시관과 시비, 가비 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생전에 남긴 여러 빛나는 업적에 비추어 볼 때 빈약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에 선생의 업적이 영구히 빛나게 하기 위하여 성역화하는 사업이 무엇보다 급선무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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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제목 내용
2016.11.07 조홍시가 창작 경위 수정 1. (원) 이덕형이 초대한 자리에서 읊은 조홍시가에 잘 나타나 있다. => (수정) 장현광의 명에 의해 지은 조홍시가에 잘 나타나 있다. 2. (원)노계 작인로의 대표작인 '조홍시가'는 그가 41세 때인 1601년 지은 시조로, 한음 이덕형을 찾았을 때 대접하기 위해 내어놓은 홍시를 보고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신 어버이를 그리워하며 다하지 못한 효성이 불현듯 생각나서 쓴 잘품이다. => (수정) 노계 박인로의 대표작인 '조홍시가'는 1600년(선조 33)이나 1601년으로 추정하는데, 박인로가 성리학을 배우기 위해 여헌 장현광을 찾아갔을 때 조홍시를 대접하고, 조홍시를 소재로 시조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한음 이덕형의 대접을 받고 '조홍시가'를 지었다고 알려져 왔으나, 이는 '조홍시가'를 보고 이덕형이 세 수를 더 지어보라고 하여 총 4수의 연시조가 된 경위가 잘봇 전해진 것이다.
이용자 의견
안** 어렸을 때 처음 접한 시조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와 닿는 내용입니다. 하물며 몇 해 전 돌아가신 모친을 생각하면 더욱 더 사무치는 작품이고, 위에서 노계 선생님의 고고한 삶의 궤적을 좇으니 흠모의 정이 또한 사무칩니다. 감사합니다.
  • 답변
  • 디지털영천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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