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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029
한자 政治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경희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지역민을 통해 획득한 권력을 행사하여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총체적 활동.

[개설]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에는 항상 희소한 자원의 획득과 배분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한다. 이런 갈등을 조정·통합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는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주로 국가라는 합법적 권력 장치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정치란 좁게는 국가 권력에 의해 수행되는 일련의 통치 행위로 정의할 수 있으며, 넓게는 국가 권력의 획득·유지·행사를 둘러싼 개인이나 제 집단 간의 투쟁이나 통합 과정을 포함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해방 이후 영천 지역에서의 정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의 정치와 정부 수립 이후의 정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영천 지역에서의 정치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제도화되지 않은 채 다양한 사회단체나 정치 조직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의 자료는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아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천 지역의 정치는 주로 국가 기구에 파견할 지역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선거와 정당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1991년 지방자치 제도가 부활함으로써 지역 정치에 대한 주민의 직접 참여가 활성화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영천 지역의 정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영천 지역의 정치는 대부분 대통령 선거 및 부통령 선거, 국회의원 및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국민 투표 등에 참여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영천 지역의 역대 대통령 선거 투표율은 제2대 88.1%, 제3대 94.4%, 제4대 97.0%, 제5대 85.0%, 제6대 83.6%, 제7대 79.8%, 제13대 89.2%, 제14대 81.9%, 제15대 77.3%, 제16대 69.4%, 제17대 70.4%로 비교적 높은 참여율을 나타내고 있다.

1972년 11월 21일 국민 투표에 의해 유신헌법이 확정된 이후 제8대부터 제12대 대통령까지는 통일주체국민회의와 대통령선거인단을 통해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대신 지역민들은 1972년과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1980년에는 대통령 선거인단을 선출했다. 당시 영천 지역에서 선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영천읍 3명, 금호읍 2명, 청통면 등 9개 면 각 1명 등 14명이었고, 대통령 선거인은 영천읍 5명, 금호읍 3명, 청통면 등 9개 면 각 2명 등 26명이었다.

영천 지역민의 정치적 요구를 집약해 온 국회의원의 수는 시기에 따라 다소 다르다. 제헌국회부터 제5대 국회까지는 2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지만, 1963년 11월 26일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명의 국회의원만 선출하도록 되었다. 선거구를 지역구[131명]와 전국구[44명]로 나누어 치렀는데, 소선거구 다수 대표제와 비례 대표제를 병용하였기 때문이다.

영천 지역의 선거구제는 이후 다시 바뀌어 1973년 2월 27일 실시된 제9대와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천군은 1972년 11월 21일 국민 투표에 의해 확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경상북도 제3선거구[포항·영일·영천·울릉]에 편입되었고, 국회의원은 이들 4개 지역에서 2명을 선출했는데, 지역 출신 후보 1명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81년 3월 25일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영천군이 경상북도 제12선거구로 편성되어 경산군과 함께 2인의 의원을 선출하게 되었으며, 영천읍이 영천시로 승격함에 따라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영천 지역은 영천시·영천군·경산군이 한 개의 선거구로 편성되어 경상북도 제9선거구로 되었다.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기존의 중선거구제가 소선거구제로 바뀜에 따라, 영천 지역에서도 영천시·영천군 단일 선거구에서 1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였다. 선거구의 명칭은 영천시와 영천군이 통합된 제14대 국회의원선거 때부터는 영천시 단일 선거구가 되었으며, 의원 수 1명은 제19대 국회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62년 12월 12일, 1969년 10월 17일, 1972년 11월 21일, 1975년 2월 12일, 1980년 10월 22일, 1987년 10월 27일 등 여섯 차례 시행되었던 국민 투표에서 영천 지역민의 참여 또는 지지율은 각각 93.5%, 78.3%, 98.1%, 92.3%, 93.5[찬성률], 93.1%로 나타나, 전국 평균 85.3%, 77.1%, 91.9%, 79.8%, 91.6%[찬성률], 78.2%보다 높음을 보여 준다.

[지방 자치와 영천 지역의 정치]

1. 지방 자치제 실시

지방 자치와 연관된 영천 지역의 정치는 주민에 의해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되는 영천시 의회와 영천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 정부의 역할이 강조된다.

우리나라의 지방 자치 제도는 제헌헌법 제97조 「지방 자치에 관한 규정」에 따라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법」이 공포됨으로써 1950년 12월 선거를 실시할 예정이었다. 당시의 지방 자치제는 지방 자치 단체의 종류를 서울특별시 및 시·읍·면의 두 종류로 하며 의결 기관인 의회와 집행 기관인 단체장을 분리시켰다. 그리고 시·읍·면장은 해당 지역 의회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하고, 지역 의회의 임기는 4년, 명예직 의원으로 구성되며 의원 수는 인구를 기준으로 정하였다.

그렇지만 6·25 전쟁으로 인해 지방 의회 선거는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25일 제1대 시·읍·의회 의원 선거가, 5월 5일에는 시·읍·면장 선거가, 5월 10일에는 도의원 선거가 각각 실시되었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서울특별시와 강원도, 지리산 인근 지역 등은 선거가 실시되지 못했지만, 영천 지역에서는 초대 읍·면 의회 의원 선거, 경상북도의회 선거, 읍·면장 선거가 모두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영천군 내에서는 영천읍 의회 의원 15명, 10개 면의 면의원 126명, 경상북도의회 의원 3명, 그리고 영천읍 및 관내 10개 면의 읍·면장이 선출되었다. 도의회 의원 3명의 소속 정당은 무소속·국민당·자유당 각각 1명으로 나타나 있지만, 읍·면의회 의원들의 소속 정당에 관한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이후 지방 자치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각종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1956년 2월 13일과 7월 8일 「지방자치법」은 두 차례 개정되었다. 이에 따라 시·읍·면장은 주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하지만, 임기가 만료되지 않은 기관장은 기득권을 인정하여 선거를 치르지 않기로 했다.

제2대 지방자치 선거는 1956년 8월 8일 실시되었으며, 영천 지역에서는 영천읍에서 읍의원 13명, 10개 면에서 면의원 119명을 선출하였는데, 기득권이 인정된 영천읍·신녕면·자양면·북안면·대창면·임고면의 읍·면장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다. 1956년 8월 13일 실시된 경상북도의원 선거에는 영천군에서 8명이 입후보하여 3명이 당선되었으며, 소속 정당은 민주당·무소속·자유당 각각 1명씩이었다. 그런데 자유당 소속 당선자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보궐 선거가 실시되었다.

제3차 지방자치 선거는 1960년 8월에 실시될 예정이었지만, 4·19혁명으로 인해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1960년 11월 1일 「지방자치법」이 개정, 공포됨에 따라 1960년 12월 12일에 시·도의회 선거, 12월 19일에 시·읍·면의회 의원 선거, 12월 6일에 시·읍·면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읍·면 의회 의원의 선거 연령은 종전 21세에서 20세로 낮아졌다.

영천 지역에서는 영천읍의회 의원 14명, 10개 면의회 의원 118명, 경상북도의원 4명을 각각 선출했는데, 도의원 선거에서는 이전 선거와 달리 민주당 소속 3명, 무소속 1명이 각각 당선되었으며, 읍·면장 선거 결과도 민주당 5명, 무소속 6명으로 나타났다. 제3대 지방 의회와 읍·면장의 임기는 1964년까지였지만, 1961년 5·16쿠데타가 발생함으로써 지방 의회는 해산되었고 지방 자치 제도도 막을 내렸다.

2. 지방 자치 제도의 부활

지방 자치 제도는 1987년 「지방 의회 구성에 관한 유예 규정」이 철폐되고 1988년 「지방자치법」을 전면 개정하여 「지방의회의원선거법」 제정이 이루어짐으로써 부활했다.

이에 따라 지방 의회가 해산된 지 30년 만인 1991년 3월 26일 영천 지역에서도 시·군·자치구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광역 의회도 재구성되었다. 기초 의원 선거에서 영천시 지역은 9개 동에서 9명의 의원, 영천군 지역에서는 11개 읍·면에서 11명의 의원을 각각 선출하여 제1대 영천시의회와 제1대 영천군의회를 구성했는데, 신녕면북안면 지역은 단일 후보로 무투표 당선되었다. 3개 선거구에서 3명의 광역 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에서는 3개 선거구 모두에서 무소속 후보가 여당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그리고 영천시와 영천군이 통합됨에 따라 영천시의회와 영천군의회도 영천시의회로 통합되었다.

1995년 6월 27일 제1회 전국 동시 지방 선거가 실시되면서, 지방 정치는 제1기 민선 지방 자치 시대로 들어섰다. 1995년 6월 27일 실시된 제1회 전국 동시 지방 선거 이후 영천시의회는 의원 정수가 1995년의 20명에서, 1998년 16명, 2002년 15명, 2006년부터는 12명[지역 의원 10명, 비례 대표 의원 2명]으로 줄어, 제6대 영천시의회에서는 10명의 지역 의원과 2명의 비례 대표 의원이 활동 중이다.

광역 의회인 경상북도의회 의원의 영천 지역 의원은 1991년 5개 선거구에서 5명이 선출되었고, 1995년 6월 27일 실시된 제1회 전국 동시 지방 선거에서 모두 재선되었다. 그렇지만 1998년 6월 4일 실시된 제2회 전국 동시 지방 선거에서 의원 수가 87명에서 60명[비례 대표 6명 포함]으로 조정됨에 따라 영천 지역 의원 수도 2명으로 줄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방 자치 단체장인 영천시장 선거는 1995년 6월 27일 처음 실시된 민선 첫 선거와 민선 2기 선거에서는 여당인 한나라당 소속 정재균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업자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협의로 실형을 선고받아 2000년 7월 시장직에서 물러났고, 2000년 10월 보궐 선거를 통해 무소속 박진규 후보가 새 시장이 되었다. 박진규 시장은 민선 3기에는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아 입후보하여 재선되었지만, 2005년 3월 뇌물 수수로 인해 전임 시장과 마찬가지로 사퇴해야 했다.

2005년 5월 31일의 영천시장 보궐 선거, 2006년 5월 31일의 민선 4기 영천시장 선거에서는 손이목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취임 1년 만에 선거법 위반으로 또 시장직을 잃었다. 이들 중 정재균 시장과 손이목 시장은 영천시에서 일했던 지역 공무원 출신이고, 박진규 시장은 경상북도청에서 일했던 지역 공무원 출신이었다.

2007년 12월 19일 실시된 영천시장 재선거에서는 외교관 출신 김영석 후보가 당선되었고, 2010년 6월 2일 실시된 선거에서 민선 5기 영천시장으로 재선되었다.

[영천 지역민의 정치 지향]

영천 지역 주민의 정치 성향은 대체로 당시의 여당을 선호하는 행태를 보이지만, 1956년 5월 15일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 결과[무소속 조봉암 37,783표, 자유당 이승만 30,786표]처럼, 시대 상황에 따라 민심의 향방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성향은 제3대 부통령 선거[무소속 함태영 33,726표, 자유당 이범석 5,157표], 제4대 부통령 선거[민주당 장면 44,174표, 자유당 이기붕 13,502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태동된 제3공화국 이후 실시된 선거에서는 집권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그 후신인 민주정의당[1981년 1월~1990년 2월], 민주자유당[1990년 2월~1995년 12월], 신한국당[1996년 2월~1997년 11월], 한나라당[1997년 11월~2012년 2월], 새누리당[2012년 2월~현재] 후보를 선호하는 성향을 보여 준다. 새누리당에 대한 지역민의 편향적 지지 성향은 김대중 정부[1998년~2003년], 노무현 정부[2003년~2008년]로 정권이 이양된 시기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어 오고 있다.

국회의원 당선자의 소속 정당은 제헌 국회 시기에는 2명 모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2대 국회 때는 2명 모두 무소속, 제3대 국회는 자유당과 무소속 각각 1명, 제4대 국회는 자유당과 민주당 각각 1명, 제5대 국회는 2명 모두 무소속이다. 특히 제2대 국회에 진출한 무소속 권중돈 의원은 제5대까지 내리 4선을 하면서 후에 민주당에 입당했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 영천 지역민의 정치적 지향은 특정 정당에 편중되지 않은 다양함을 보여 준다.

중선거구제를 채택했던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국회에서도 대개 집권 여당소속 의원 1명과 무소속 또는 야당 의원 1명씩 의원이 선출되었으며, 무소속이었던 권오태 의원은 이후 야당인 신민당의 공천을 받아 3선 의원이 되기도 했다. 더욱이 제10대 지역 국회의원에는 무소속과 야당인 신민당 당적을 가진 사람이 각각 선출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형성된 지역민의 야당 선호가 여전함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제13대 이후 현재까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지역 인사는 모두 민주정의당과 그 후신인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았거나, 무소속이었다. 그리고 무소속으로 당선된 의원의 경우 당선 후에는 거의 한나라당에 입당함으로써 영천 지역의 정치 지향이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가 가지는 한나라당 편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성향은 1995년 이래 선출된 4명의 시장이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았거나 보궐 선거, 또는 재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당선된 후에는 한결같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자치 단체장의 사례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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