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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18
한자 新寧郡
이칭/별칭 사정화(史丁火)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신녕군 설치
변천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신녕군을 영천군에 통폐합
비정 지역(?) 신녕군 - 경상북도 신녕 지역 일대
성격 행정구역
관련 문헌 『삼국사기』|『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

[정의]

1895년부터 1913년까지 경상북도 신녕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개설]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 당시 지방 제도 개정건이 공포되어 새로운 지방 행정 제도가 설치되면서 신녕현신녕군이 되었다.

[명칭 유래]

신녕현의 옛 이름인 사정화(史丁火)는 지형이 배[舟]와 같고 한들[현 완전동(莞田洞)]에 3m 높이의 자연석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봉화제(烽火堤) 바람이 세차게 불면 갑령제(甲嶺堤)를 중심으로 물이 남북 방향으로 흩어져 이 지역은 풍수 지리적으로 풍파를 막기 어려운 지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통일신라 경덕왕이 한식(漢式)으로 군현제를 정비할 당시 이 지역은 바다의 풍파를 막아 평안하게 지나게 한다는 뜻으로 신녕현으로 지명을 개편하였다.

[형성 및 변천]

신라시대 사정화현(史丁火縣)·화산(花山)이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이름인 신녕으로 개명하여 양주(良州) 소관 임고군(臨皐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 1018년(현종 9) 경주부(慶州府)의 임내가 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 감무를 두었다.

신녕현은 태조 3년 영주 임내인 이지현을 이속시키고 14개 속역을 거느린 장수도역을 두어 신녕현의 소재지로 삼았다. 1497년(연산군 3)에 길수(吉修)라는 현감이 향리들을 너무 엄히 다스려 호장 10명의 반란이 일어나자 현을 폐지하고 영천군에 소속시켰다. 그러나 얼마 뒤 1503년(연산군 9)에 복현이 이루어진다.

1894년 지방제도를 23부제로 개혁하면서 대구부(大邱府) 소관 신녕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북도 신녕군으로 개편되었다. 일제강점 하인 1914년 신녕군영천군에 병합하여 신녕면이 되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에 “신녕현(新寧縣) 본시 사정화현(史丁火縣)으로, 경덕왕이 신녕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고 하였다.

『고려사』 제57권 지(地) 경상도조에 “현종 9년 경주에 소속시켰으며 공양왕 2년에 감무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동일한 내용에 “속현 이지은소(梨旨銀所)가 있으며, 본디 영주(永州)에 붙였었는데, 고려 말에 이지현으로 승격시켜 그대로 영주(永州)에 붙였다가, 본조 태조 갑술년에 이에 내속시켰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읍지 등의 연혁 조에도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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