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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19
한자 永川郡
이칭/별칭 영주(永州)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영천군, 지방 행정 제도 설치되면서 기존 영천군에서 개편
비정 지역 영천군 - 경상북도 영천 지역
성격 행정구역
관련 문헌 『삼국사기』|『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

[정의]

1895년부터 1913년까지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개설]

영천군(永川郡)은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 당시 지방 제도 개정건이 공포되어 새로운 지방 행정 제도가 설치되면서 영천군이 되었다.

[명칭 유래]

고려 시대 영주(永州)로 불렸던 영천은 조선 개국 후 1413년(태종 13) 작은 군현은 ‘주’라는 명칭을 금지하고 대신 ‘천’과 ‘산’을 사용하도록 명하자 천을 선택해 영천(永川)이란 지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영천은 진한(辰韓)의 대표적인 소국인 골벌국(骨伐國)이 존재했던 지역으로, 신라에 병합된 후 절야화군(切也火郡)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 개편 때 절야화군임고군, 사정화현신녕현으로 개명되어 양주에 속하였다.

고려 초 도동(道同)과 임천(臨川) 두 현을 합쳐 설치된 영주(永州)고울부(高鬱府)라고도 불렀다. 995년(성종 14) 자사(刺史)를 파견했으나, 1018년(현종 9) 동경유수관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감무를 파견했다가 지주사(知州事)로 승격되었다. 1202년(신종 5) 경주에서 신라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이와 대립해 경주 별초군(別抄軍)과 싸움이 일어났으며, 1233년(고종 20)에는 경주인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1413년(태종 13)에 처음 영천이란 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643년(인조 22) 영천 출신 군관 김석남과 심기원의 역모로 한때 현으로 격하를 겪지만, 1654년(효종 4) 다시 군으로 복원이 이루어졌다.

1789년(정조 13) 면리제로 통일되면서 영천은 22개 면에 291개 동으로 개편되었고, 갑오개혁 당시 지방제도 세분화로 2등급에 해당하는 영천군이 되었으며, 일제 강점하인 1913년 명칭과 위치, 관할 구역의 개편과 통폐합 조치에 따라 신녕군을 합속시켰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지리조에 “임고군(臨睾郡)은 본시 절야화군(切也火郡)으로, 경덕왕 때 임고로 개명하였다. 지금은 영주(永州)니, 영현(領縣)이 다섯이다”라 하였고, 『고려사』 경상도조에 “영주(永州)는 고려 초 신라 시기 임고군(臨皐郡)의 도동(道同)과 임천(臨川) 두 현을 합쳐서 설치한 것인데 고울부(高鬱府)라고도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 “본조 태종 계사년에 예(例)에 의하여 영천군(永川郡)으로 고쳤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후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증보문헌비고』, 그리고 여러 읍지(邑誌)의 연혁조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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