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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장날 만세 운동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28
한자 永川場-萬歲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12일연표보기 - 영천장날 만세 운동 발발
발생|시작 장소 영천장날 만세 운동 - 경상북도 영천시 문내동 38-6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홍종현

[정의]

1919년 4월 12일 영천읍 장날에 전개된 만세 시위 운동.

[개설]

영천장날 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12일 영천읍 시장에서 농부 홍종현(洪鍾顯)이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여 군중을 선동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일어난 3·1 운동은 서울에서 시작되어 5월 중순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만주·하와이 등 국외에서도 계속되었다. 비폭력·일원화·대중화 등을 원칙으로 한 3·1 운동에는 청년·학생·농민·노동자 등이 참여하였다.

[역사적 배경]

3·1 운동은 국내외 정세에서 발생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선 국내적으로는 일제의 폭압적 지배에 많은 고통을 받은 한국인들의 분노가 해방을 갈구하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외적으로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 등이 한반도를 비롯한 피압박 약소민족의 의식을 고취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는 피억압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한층 고무시켰다고 하겠다.

[경과]

신촌면 입석동의 농부 홍종현은 4월 12일 영천읍 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미리 ‘대한독립만세’라고 쓰인 붉은 기(旗)와 태극기를 준비하였다.

거사 당일 3시 30분경 장꾼 1,000여 명이 모여들자, 홍종현영천면 창구동(倉邱洞) 공립보통학교 교문 앞 시장[옛 염매시장 자리]에서 자신이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여 군중을 선동하였다.

그러나 시장을 순찰 중이던 순사보 김배석(金拜石)이 그를 현장에서 체포함으로써 시위 운동은 중단되었다.

영천읍 만세 시위 운동 소식을 접한 영천읍 과천동(果川洞)의 김정희(金正希)[최복암의 부인]는 그날 밤 작은 칼로 손가락 끝을 잘라 흰색 명주에 한글과 한문을 섞어 ‘대한독립만세’라는 혈서를 썼다.

이튿날 오전 11시, 김정희는 혈서로 만든 기를 들고 영천면 과전동에서 창구동으로 통하는 노상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김정희는 모진 고문을 하며 자백을 강요하는 일본 경찰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영천경찰서 고등계 경찰보로 근무하던 동생 김태진(金泰鎭)의 설득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결과]

영천장날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한 홍종현은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기각되었다. 그의 처 김정희는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언도받았다.

[의의와 평가]

3·1 운동은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전개된 항일 독립 운동이었다. 영천 지역민들은 강력한 반일의식과 민족의식으로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일제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 시위 운동은 1920년대 노동 운동·농민 운동·청년 운동·형평 운동 등 부분별 민족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나아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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