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760
한자 南浦亭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바깥완산길 93-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태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500년대 후반 - 남포정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임진왜란 이후 - 남포정 붕괴
개축|증축 시기/일시 1720년대 - 남포정 중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826년 - 남포정 중수
현 소재지 남포정 - 경상북도 영천시 바깥완산길 93-4[완산동 557]지도보기
성격 누정
양식 장혀수장|홑처마|팔작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1.5칸
문물|보호단위 등급 비지정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완산동에 있는 조선 전기 학자 이군빈(李君賓)을 기리기 위한 정자.

[개설]

이군빈[1568~1640]의 본관은 성산, 자는 중관(中觀), 호는 남포(南浦)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무첨당(無忝堂) 이의윤(李宜潤)과 친분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백형 이국빈(李國賓)과 함께 영천성(永川城) 전투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책록되고 사재감정(司宰監正)에 제수되었다.

[위치]

남포정은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완산동 557번지에 해당하며 영천시장 동쪽의 완산동 금호강 둔치 너머에 있다.

[변천]

남포정은 기문을 통해 살펴보면 이군빈이 은거하며 학문을 하기 위해 남천[금호강] 가에 초가로 건립한 것으로 조양각 맞은편에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학문에 전념하던 중 갑자기 누각이 무너져 없어졌다. 후손들이 이를 안타까워 하다가 이군빈의 팔세손 이호순(李浩純)이 문중과 협의해 옛 터에 삼량가의 정자를 중건했다. 이 후 100년 뒤에 한 차례 중수가 있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문을 통해서는 정확한 건립 연대를 알 수 없지만 현재 종도리 장혀의 묵서명과 대조해 보면 임진왜란 전에 건립되었고 1720년대에 중건되었으며, 1826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 종도리 장혀 하면에는 ‘상지즉위이십육년정유이월초팔일진시수주포량(上之卽位二十六年丁酉二月初八日辰時竪柱抛樑)’이라고 쓰여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기문은 1857년 또는 1897년에 밀양인(密陽人) 박헌순(朴憲舜)이 기록하고 하성(夏城) 조규백(曺奎白)이 썼다.

[형태]

남포정금호강 변 남쪽 평평한 대지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배치는 마당을 들어서면 정면에 남포정, 우측에 최근에 건립된 추원재가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남포정은 시멘트로 마감된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앉히고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진입은 정면의 기단 중앙부의 계단을 통해 대청으로 오른다.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드린 다음 전면에 퇴를 둔 전형적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 건물이다. 우 측방 후면에는 상부에만 벽장을 두었다. 전면의 퇴 밖으로는 계자각 난간을 두른 헌함을 두었는데 어칸 중앙부에는 출입을 위해 난간이 끊겨있다. 우측면과 배면에는 쪽마루를 두었고, 정면 온돌방 하부 즉, 누하로는 함실아궁이를 두었다. 특히 대청 전면의 양 기둥만 두리기둥을 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썼다.

창호는 청방 간 양쪽에 외여닫이 굽널 세살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간다. 대청 후면에는 머름을 들이고 판창을 두었으며, 방 전면에는 머름 위에 상여닫이 세살창을 두었다. 기둥 상부는 아무런 장식 없이 간결한 장혀 수장으로 꾸며 삼량가의 가구를 완성했다. 지붕은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다.

[현황]

남포정은 평평한 대지에 정자와 최근에 지어진 추원재가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정자 전면 어칸 상부에 ‘남포정(南浦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청방 간 상부에도 최근에 제작한 ‘남호정(南湖亭)’이라는 현판과 그 옆에 ’강목당(講睦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한편 대청 후면 상부에는 ‘남포정기(南浦亭記)’ 편액이 걸려 있다.

[의의와 평가]

남포정 정자는 전혀 꾸밈없이 간결한 구성을 하고 있다. 특히 대청 전면 양쪽에만 원형기둥을 쓴 것은 중앙부 진입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