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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리 고인돌 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860
한자 新里里支石墓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신리리 7-1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김광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청동기 시대 - 신리리 고인돌 떼 조성
훼손 시기/일시 1969년 - 신대리 고인돌 떼 농경지 정리 사업 때 4개 기 훼손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4년연표보기 - 신대리 고인돌 떼, 도로 공사로 인한 발굴 조사 시행
소재지 신리리 고인돌 떼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신리리 지도보기
성격 무덤
양식 개석식 고인돌
크기(높이) 높이 60~125㎝|지름 125~275㎝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신리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개설]

신리리 고인돌 떼는 2007년에 고인돌 유적의 서쪽 마평지에 접해 서쪽에서 도로확장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청동기 시대 유적인 신리리 유적이 발굴되었다.

[위치]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2리에 있는 도계서원 진입로 초입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마평지’라는 저수지가 있다. 신리리 고인돌 떼는 이 마평지의 북동쪽 제당[못둑]에서 동쪽으로 약 20m지점의 논과 논 사이에 조성된 민묘 일대에 세 기가 있다. 또 이곳에서 동쪽으로 15m가량 떨어진 논 가운데에서 한 기가 있다. 이들 유적은 도로 변의 버스 승강장에서 눈에 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신리리 고인돌 떼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네 기 외에 향후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1969년에 실시된 경지 정리 이전에 있었던 네 기와 함께 더 많은 고인돌이 확인될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인돌 유적에서 서쪽으로 100m 정도에 2004~2007년 도로공사로 인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청동기 시대 주거지 6동, 수혈유구 3기, 구상유구 2기, 원삼국 시대 널무덤 1기 등 총 12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형태]

신리리 고인돌 떼는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하부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들 유적은 세 기가 한곳에 모여져 있고, 한 기는 동쪽으로 떨어져 모두 네 기가 잔존한다. 세 기는 1m 안팎으로 거의 붙어 일렬로 줄을 지어있는데 그 크기를 확인해보면, 남쪽에서부터 각각 275×230×125㎝, 155×125×85㎝, 240×100×100㎝이고 동쪽에 떨어진 것은 125×100×60㎝이다. 지표면에 반쯤 묻혀있는 개석은 형태의 정형성이 없는 괴형(塊形)으로 그 재질은 퇴적암의 역암으로 굵은 자갈이 다량 포함되어 있다.

[출토 유물]

신리리 고인돌 떼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출토 유물은 보고된 바 없고, 현장에서 발견되는 유물도 없다. 다만 고인돌 유적 서쪽의 발굴지역에서 심발형 토기·호형 토기·공열 토기·합인석부·상연석·지석·찰절구·소형 연질호 등이 출토되었다.

[현황]

마평지의 북동쪽에 분포하고 있는 신리리 고인돌 떼는 세 기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동쪽에 별도로 떨어져 한 기가 땅에 반쯤 묻힌 상태로 전체 네 기가 잔존한다. 『문화유적분포지도』 도천리 지석묘군 내용에 ‘예전에는 모두 여덟 기 정도가 있었다’고 하지만[신리리 고인돌 떼는 『문화유적분포지도』에 도천리 지석묘군으로 잘못 기술되어 있다.] 1969년에 경지 정리를 하면서 네 기가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유적의 북서쪽 400m에는 북안천이 남서에서 북동쪽으로 흐르고 있고 그 앞으로 ‘마평들’로 불리어지는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유적의 남서쪽에는 마평지 너머 얕은 구릉성 산지가 있다. 한편 북안천을 따라가면서 신리리 고인돌 떼와 동시대의 유적인 신대리 고인돌 떼, 도천리 고인돌 떼가 있고 삼국 시대로 추정되는 신리리 고분 떼, 신대리 고분 떼, 도천리 유물 산포지 유적이 각각 있다.

[의의와 평가]

마평지 인근에서 확인되는 네 기의 신리리 고인돌 유적은 현재까지 발굴조사 등의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실체를 명확히 밝힐 수는 없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북안천을 따라 점점이 분포하는 고인돌 유적과 주변 지형 등을 고려할 때 이 유적을 청동기 시대 고인돌 유적으로 보고 있다.

고인돌 유적의 인근에서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확인되어 앞의 고인돌 유적과 신리리 유적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신리리 고인돌 떼의 시기를 뒷받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고인돌 유적이 매장처였다면 그 피장자는 서편 신리리 유적 일대에서 거주했을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당시 청동기 시대 묘제 특성과 문화상이 어느 정도 밝혀진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점에서 신리리 고인돌 유적은 매우 중요하며 가치가 있는 유적으로 판단된다. 이 두 유적은 앞으로 연구를 바탕으로 신리리 취락유적으로 묶어 설명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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