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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읍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885
한자 永川邑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철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591년연표보기 - 영천읍성 축성
소재지 영천읍성 - 경상북도 영천시 문내동·성내동·교촌동·창구동지도보기
성격 읍성
지정 면적 둘레 897m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문내동·성내동·교촌동·창구동에 있었던 조선 시대의 읍성.

[개설]

영천읍성은 1591년(선조 24)에 축성되었지만 이듬해 임진왜란의 전화(戰禍)를 입어 파괴되었다. 지금은 고문헌의 기록과 고지도, 현장 확인 등을 통해 성곽의 범위를 대략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성의 추정 범위는 영천시 문내동·성내동·교촌동·창구동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남천과 절벽, 배후의 산지 등 자연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쌓은 자연지세형 읍성으로 방형(方形)형태의 평산성(平山城)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까지 남아있던 서쪽과 동쪽의 일부 잔존 성벽이나 객사, 동헌 등의 공해(公廨) 건물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되었고 도시 개발로 인해 대부분 없어졌다.

[변천]

영천읍성은 1472년(성종 8) 경상도 지역의 성보(城堡) 수축을 논할 때 처음 건의되기 시작했지만 실제적으로 축성이 이루어진 것은 1591년(선조 24년)이었다. 그러나 『선조실록』에는 축성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허물어지고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읍지』에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왜병들에게 함락되었으나 그 해 7월 신령 의병장 권응수, 영천 의병장 정대임·정세아·전삼달·김대해 등 3,560여 명이 의병진을 구성하여 화공전(火工戰) 끝에 전국에서 최초로 되찾았다는 비교적 상세한 내용도 담겨 있다. 그 이후의 읍성에 대한 수축이나 증축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1872년의 지방지도 중 「영천군전도」의 표현에는 서측 성벽 일부와 남문, 서문만이 잔존하고 주거 영역이 서측 성벽을 침식했으며 북문과 동문이 각각 북문옛터[北門古墟]와 동문옛터[東門古墟]로 표기되어 있어 이전에 이미 성곽이 허물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읍성의 규모는 1864년 편찬된 『대동지지(大東地志)』나 조선 후기의 『읍지』들에 그 둘레가 1,902척이고 우물 세 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벽의 높이나 치성(雉城), 여장(女墻)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읍성의 위곽(圍郭) 둘레 1,902척은 조선 시대 성벽 축조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척도인 포백척(布帛尺)[46.7cm]을 적용하여 미터법으로 환산해 보면 약 897m에 불과하다. 이것은 영천읍성의 초축(初築) 시 전체 둘레를 나타내었다기보다 그 당시까지 남아있던 서측 및 동측의 잔존 성벽 길이를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19세기 『읍지』의 「고지도」에 표현된 잔존 성벽을 지적도 상에서 재었을 때 서측이 약 620m, 동측이 약 270m 정도로, 이를 합하면 1,902척에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위치]

문헌과 「고지도」를 통해 분석한 영천읍성의 영역은 현재의 문내동·창구동·과전동·교촌동·성내동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읍성의 서쪽은 호연정에서 충혼탑에 이르는 곳에 성벽을 쌓았으며, 동쪽은 중앙초등학교의 동측 계곡[도수장골]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성하였고, 남쪽은 남천의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북쪽은 마현산(馬峴山)의 지형을 이용하여 토축으로 축성하였다고 보인다. 또한 동서남북 사면에 모두 성문을 내었으며 성 내에는 객사와 동헌을 비롯한 여러 공해(公廨) 건물이 있었다. 성내 도로망은 「고지도」에 의하면 동서남북의 성문을 연결하는 십자형(十字形) 도로 패턴을 이루고 있다. 종합적으로 영천읍성은 남천과 절벽, 배후의 산지 등 자연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쌓은 자연지세형 읍성으로 방형(方形)형태의 평산성이었다.

[현황]

영천읍성의 성벽은 축성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왜군들에 의해 대부분 허물어지고 말았다. 전란이 끝난 뒤에도 서문과 남문, 관아 건물들은 복구하였지만 위곽은 수축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까지 남아있던 서쪽과 동쪽의 일부 잔존 성벽마저도 일제 강점기와 도시개발 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손되었다.

현재 성벽과 동서남북의 4개 문지(門址)는 그 위치를 추정할 뿐이다. 중앙초등학교 교정 화단에는 1995년 3월 26일 ‘영천향토사연구회’와 ‘보이걸스카우트 골벌지역대’가 설치한 ‘영천읍성지(永川邑城址)’라는 표지석 1기가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타 지역의 읍성에 비해 비교적 늦은 조선 중기에 축성된 영천읍성은 완성된 뒤 1년만에 임진왜란을 맞아 훼손되고 말았다. 현재 성곽의 규모와 모습은 고문헌의 기록과 「고지도」, 현장 확인 등을 통해 대략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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