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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895
한자 餘音峴烽燧址
이칭/별칭 여음동(餘音同) 봉수,여통(餘通) 봉수,여질동(餘叱同) 봉수,여질동산(餘叱同山) 봉수,여음현(餘音峴) 봉수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부산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철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조선 전기 - 여음현 봉수 건립
폐지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여음현 봉수 폐지
소재지 여음현 봉수 터 - 경상북도 영천시 신령면 부산리 봉화재 일대지도보기
성격 봉수 터
지정 면적 전체 둘레 86.5m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부산리 봉화재 일대에 있는 조선 시대 봉수대 터.

[개설]

봉수는 봉(烽)[횃불]과 수(燧)[연기]로 변경의 군사 정보를 정해진 신호 체계에 따라 중앙과 주변 지역에 전하던 통신 방법이었다. 봉수제는 삼국 시대부터 원시적으로 활용되었으나 정례화한 것은 고려 시대였다. 이후 조선 세종대에 크게 정비되어 1894년까지 국가적으로 운영을 하였다.

조선 시대 봉수제는 노선 상으로 기간 봉수인 직봉(直烽)과 보조 봉수인 간봉(間烽)으로 구별하거나, 봉수대의 설치 지역과 기능에 따라 경봉수(京烽燧)·내지 봉수(內地烽燧)·연변 봉수(沿邊烽燧)로 나눈다. 경봉수는 조선 시대 전국의 봉수가 집결하였던 봉수로 서울 남산의 목멱산 봉수를 이르며, 연변 봉수는 지방의 해안 및 변경 지역의 최일선에 설치되었던 봉수였다. 내지봉수는 내륙 각지에 설치되어 서울의 경봉수와 변경의 연변 봉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던 중간 봉수로 조선 시대에는 주로 복리 봉수(腹裏烽燧)로 불렀다.

여음현 봉수는 성격상 부산 다대포진 응봉 봉수(鷹峰烽燧)에서 초기(初起)하여 서울 목멱산(木覓山)[남산] 봉수로 전달되던 제2로 직봉 노선의 내지 봉수이다. 대응 봉수로는 조선 전기에는 남쪽 청통면 신덕리 소재의 성산 봉수(城山烽燧)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았으나 조선 후기 새롭게 청통면 계지리구토현 봉수(仇吐峴烽燧)가 증설되면서 이곳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았다. 북쪽으로는 노선의 변동 없이 일관성을 유지했는데 군위 의흥면 소재의 토현 봉수(吐峴烽燧)로 보냈다.

[변천]

여음현 봉수는 조선 전기인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부터 전 시기의 각종 지지서(地誌書)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초축 시기는 조선 전기이고, 1894년(고종 31) 전국 봉수 제도가 철폐되면서 폐지되었다. 봉수 명칭은 문헌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며 조선 전기에는 여음동(餘音同), 여통(餘通), 여질동(餘叱同), 여질동산(餘叱同山) 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 후기에는 여음현(餘音峴), 여음동(餘音洞), 여질동산(餘叱洞山) 등으로 표기하였다.

[위치]

여음현 봉수영천시 신녕면 부산리의 해발 235m인 봉화재 정상에 있는데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지형상 4면이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고 있다. 특히 봉수 터의 북쪽은 신녕천에 면하여 절벽으로 형성된 봉우리 지형이다.

[현황]

조선 시대 내지봉수대에는 통상적으로 연조(煙竈)·방호벽·봉수군 주거·고사(庫舍) 등 봉수군이 주어진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기본 시설이 갖추어졌다. 현재 신녕면 부산리의 해발 235m인 봉화재 정상에 있는 여음현 봉수는 영천 지역의 봉수 중 유지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봉수대는 남북 장축 32m, 동서 단축 19.3m, 전체 둘레 86.5m 정도로 평면 형태는 타원형에 가깝다. 봉수 내부는 북고남저형 경사지를 이용하여 상하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하였는데 연조 등의 거화 시설은 상단에 배치하였다. 하단에는 고사(庫舍)나 봉수군의 주거와 같은 부속 시설을 두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상·하단의 높이차는 1.7m 정도로 상단 단부는 지반의 붕괴를 막기 위해 석축을 쌓았고 두 공간의 통행은 서측에 난 경사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방호벽은 남쪽을 제외한 3면이 비교적 잘 남아있으며 남쪽은 대부분 없어졌으나 봉수대 운영 당시에는 4면을 모두 토석혼축으로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호벽의 잔존 높이는 약 1.5~2.0m이며 잔존 폭은 1.5m 정도이다. 방호벽의 구조는 먼저 자연 능선을 깎아낸 후 자연 할석을 이용하여 외면을 돌로 쌓고 그 안쪽은 작은 할석과 흙으로 채워 넣어 축조하였다. 연조는 1기가 확인되는데 그 규모는 둘레 약 24m, 높이 1.2m 정도로 말각방형(抹角方形)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여음현 봉수는 영천 지역의 봉수 중 유구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으로 방호벽·출입구·연조 등이 잘 남아있다. 특히 봉수 내부의 북고남저형 경사지를 이용, 상하 2개의 공간으로 분리하여 합리적으로 사용한 것은 진주 광제산 봉수, 고령 이부로산 봉수, 밀양 종남산 봉수 등에서만 나타나는 드문 사례이다. 여음현 봉수는 우리나라의 내지 봉수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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