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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938
한자 玉山全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집필자 전민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756년연표보기 - 전성천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827년연표보기 - 전성천 사망
입향지 옥산 전씨 입향지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완전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옥산 전씨 세거지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완전리·화북면 용소리지도보기
성씨 시조 전영령(全永齡)
입향 시조 전성천(全聖天)

[정의]

전영령(全永齡)을 시조로 하고 전성천(全聖天)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세거 성씨.

[연원]

옥산 전씨(玉山全氏)의 시조 전영령은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의 27세손으로 고려 신종 때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으로 공을 세워 옥산군(玉山君)[지금의 경산]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이 정선 전씨(旌善全氏)에서 분적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옥산 전씨 영천 지역 입향조는 20세(世) 전성천이다.

[입향 경위]

전성천[1756~1827]이 영천 지역으로 입향한 연유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그의 후손들이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완전리에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천 지역 첫 입향지는 그곳으로 여겨진다. 전성천의 손자 전해수(全海秀)[1808~1877]는 다시 더욱 궁벽진 곳인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용소리로 이주하였다.

[현황]

입향 이후 인물로는 전성천의 아들 전국록(全國祿)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전해수의 손자 전상필(全祥弼)은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매월 삭망(朔望)에 도포를 입고 높은 곳에 올라 서울의 고종황제에게 배례를 올렸다. 고종황제께서 승하하시자 친히 만사(輓詞)를 지어 경성을 다녀온 후 3년 상을 지냈다.

1920년 가산을 모두 내어 애민불망비와 하마비(下馬碑)를 세우고 각각 비각을 세우자 일경(日警)이 호출하여 강압적으로 철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형벌을 받아 사경을 헤매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다시 대구감옥에 유치되었으며, 결국 장독(杖毒)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 1944년에 주재소 순사들이 보국대원 10여 명을 이끌고 와서 비와 비각을 없앴다. 애민불망비는 다시 세웠으나, 하마비와 비각은 복원하지 못하였다.

옥산 전씨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완전리화북면 용소리에 세거 하였으나 보현산댐의 건설로 인해 모두 이주하였다.

[관련 유적]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용소리대한광무황제애민불망비(大韓光武皇帝愛民不忘碑)가 남아 있는데 보현산댐 건설로 인해 수몰 위기에 있다.

이용자 의견
전** 정말멋집니다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 답변
  • 디지털영천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4.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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