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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082
한자 全宇成
이칭/별칭 이극(爾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민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72년연표보기 - 전우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16년 - 전우성 무과에 급제
몰년 시기/일시 1845년 5월 26일연표보기 - 전우성 사망
묘소|단소 전우성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성격 무인
성별
본관 용궁
대표 관직 제주판관

[정의]

조선 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무인.

[가계]

전우성(全宇成)의 본관은 용궁(龍宮). 자는 이극(爾極)으로, 1772년(영조 48)에 태어나 1845년(헌종 11) 5월 26일에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종사랑(從仕郞) 전지성(全知性)이며, 증조는 전상규(全尙圭), 조부는 전득천(全得天)이다. 생부는 전만종(全萬宗), 어머니는 고성 이씨(固城李氏)로 이광유(李光有)의 딸인데, 어려서 백부 전만용(全萬容)에게 출계하였다.

부인은 숙인(淑人) 영일 정씨(迎日鄭氏)로 정태양(鄭泰陽)의 딸이다. 슬하에 1남 4녀를 두니 아들은 통덕랑(通德郞) 전희백(全熙伯)이며, 사위는 인동인(仁同人) 장동철(張東喆)과 최흥주(崔興柱)·장응록(張應錄)·서이정(徐頤正)이다.

[활동 사항]

전우성은 1816년(순조 16)에 무과에 급제하여 감찰을 지내고 제주판관이 되었을 때 임금께서 “무엇으로 백성을 다스리는가?”하고 물으시자 “먼저 백성들을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제주판관을 그만두고 돌아오는 길에 도민들이 거리를 메우고 “청렴하고 관후한 관원이 떠나간다”며 눈물로써 전송하였다. 전우성이 배에 올라 살펴보니 자신도 모르는 궤짝이 몇 개 있는지라 도민들을 향하여 “뜻과 정은 고마우나 나의 근본 뜻은 어기지 못하겠노라”하고 내려두고 떠났다.

이 같은 행적과 10여 년을 관직에 있었음에도 손님을 맞을 사랑채 한 칸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의 청렴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묘소]

전우성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 서쪽 어봉(魚鳳)의 어머니 산소 동쪽에 손좌(巽坐) 향으로 있으며, 제헌의원인 백파(白坡) 정도영(鄭島榮)의 갈문(碣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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