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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113
한자 鄭世雅
이칭/별칭 화숙(和叔),호수(湖叟),강의(剛義)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전민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35년연표보기 - 정세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58년 - 정세아 사마시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정세아 창의함
몰년 시기/일시 1612년연표보기 - 정세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32년 - 정세아 병조 판서에 임명됨
추모 시기/일시 1788년 - 정세아 강의 시호를 받음
묘소 정세아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묘소 하천재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지도보기
묘소 신도비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묘소 강호정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지도보기
묘소 세덕사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768 지도보기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영일
저술 『호수실기(湖叟實記)』

[정의]

조선 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가계]

정세아(鄭世雅)의 본관은 영일.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叟)이고, 1535년(중종 30)에 태어났다. 고조는 사성(司成) 정종소(鄭從韶)이며, 증조는 찰방(察訪) 정이휘(鄭以揮), 조부는 정차근(鄭次謹)이다. 아버지는 창릉 참봉(昌陵參奉) 정윤량(鄭允良)이며, 어머니는 의인 최씨(宜人崔氏)로 봉사(奉事) 최덕금(崔德嶔)의 딸이다.

부인은 일직 손씨(一直孫氏)로 현감(縣監) 손치운(孫致雲)의 딸이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생원(生員)인데 증직으로 좌승지(左承旨) 정의번(鄭宜藩)과 정여송(鄭汝頌), 사과(司果) 정안번(鄭安藩), 부호군(副護軍) 정수번(鄭守藩)이며, 사위는 장운익(張雲翼)과 양우형(楊遇亨)이다.

[활동 사항]

정세아는 어려서부터 진중한 성격에 덕망이 있었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1592년 처음으로 창의(倡義)하였고, 향인들이 추대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당시 왜적들이 영천성을 점거하였는데, 정세아는 장사들로 하여금 밤에 성안으로 들어가게 하여 바람을 따라 불을 놓게 하니, 적들이 크게 놀라 무너져 달아났다. 정세아가 달아나는 적을 쫓아가 목을 베니 이로 인하여 영천이 온전하게 되었다.

난리가 평정 된 후 조정에서 논공행상을 할 때 정세아는 “신은 단언하건대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적을 무찌른 것이지 공훈과 명예는 뜻함이 아닙니다”라 하고 모든 공로를 제장들에게 미루었다.

이듬해 평양과 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으로 돌아갔다. 선조(宣祖)는 그의 현명함을 듣고 황산도 찰방으로 임명하고, 병조 참판으로 추증하였다. 1732년(영조 8)에 병조 판서로 추증을 더하고, 1788년(정조 12)에 강의(剛義)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목판본인 9권 2책의 『호수실기(湖叟實記)』가 있다.

[묘소]

정세아의 묘소는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성곡리(聖谷里) 하천(夏泉)에 있으며, 송인명(宋寅明)이 찬(撰)한 묘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강의(剛義)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臨皐面) 선원리(仙源里)세덕사(世德祠)를 세워 제향하고 있다.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성곡리(聖谷里)정세아가 직접 지어 소요하던 강호정(江湖亭)과 묘재인 하천재(夏泉齋) 그리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조현명(趙顯命)이 찬(撰)한 신도비(神道碑)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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