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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224
한자 李衡祥
이칭/별칭 중옥(仲玉),병와(甁窩),순옹(順翁)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민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53년 5월 23일연표보기 - 이형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77년 - 이형상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80년 - 이형상 별시문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81년 - 이형상 승문원 부정자·율봉도찰방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685년 - 이형상 승문원 정자·봉상시 직장·성균관 전적·사헌부 감찰·호조 좌랑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686년 - 이형상 통훈대부, 병조정랑, 광주부경력
활동 시기/일시 1687년 - 이형상 성주목사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690년 - 이형상 청주목사·동래도호부사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691년 - 이형상 금산군수 겸 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699년 - 이형상 경주부윤 겸 경주진병마절제서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701년 - 이형상 제주목사 겸 제주진병마수군절제사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705년 - 이형상 영광군수 겸 전주진병마절제사에 임명됨
몰년 시기/일시 1733년 11월 30일연표보기 - 이형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29년 - 이형상 영혜사에 추향됨
출생지 이형상 - 인천광역시 남구 주안6동
수학|강학지 호연정 -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 지도보기
묘소|단소 이형상 묘소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1리
사당|배향지 병와유고각 -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호연정 -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전주
저술 『병와집(甁窩集)』 외 다수[보물 제652호]
대표 관직|경력 제주목사

[정의]

조선 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가계]

이형상(李衡祥)의 본관은 전주.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 또는 순옹(順翁)이며, 1653년(효종 4) 5월 23일 인천 죽수리(竹藪里) 소암촌(疏巖村)[현 인천광역시 남구 주안6동]에서 태어나 1733년(영조 9) 11월 30일 과천(果川) 객사에서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송화현감(松禾縣監) 이승기(李承器)이며, 증조는 강음현감(江蔭縣監) 이사민(李師閔), 조부는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이장형(李長馨)이다. 부친은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이주하(李柱厦)이며, 모친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성균진사(成均進士) 윤세구(尹世耈)의 딸이다.

부인은 은진 송씨(恩津 宋氏)로 통덕랑(通德郞) 송지규(宋之奎)의 딸이다. 아들은 통덕랑(通德郞) 이여강(李如綱)과 생원(生員) 이여항(李如沆), 생원(生員) 이여성(李如晟), 진사(進士) 이여적(李如迪), 이여극(李如克)이며, 사위는 좌랑(佐郞) 김징경(金徵慶), 오명운(吳命運)이다.

[활동 사항]

이형상은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장원을 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168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681년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이듬해 율봉도 찰방(栗峰道察訪)에 제수되었다.

1685년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1686년 통훈대부(通訓大夫) 병조정랑(兵曹正郞), 광주부경력(廣州府經歷)을 지내고, 1687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교화에 힘써 20조의 훈첩(訓帖)을 반포하고 유생 150명을 선출해 관비로 교육시켰으며, 인조 때 의사 이사룡(李士龍)을 위해 충렬사(忠烈祠)를 지어 사적을 길이 남겼다.

또한 파괴된 채 방치되던 독용산성(禿用山城)을 민정(民丁)을 차출해 3일 만에 완축시켰다. 이듬해 기사사화(己巳士禍)와의 관련으로 사직하였다가 12월 금산군수(錦山郡守) 겸 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全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로 제수되었다.

1690년 경오년(庚午年) 청주목사(淸州牧使), 동래도호부사(東萊都護府使)를 거쳐 이듬해 동래도호부사 겸 동래진병마첨절제사(東萊鎭兵馬僉節制使)을 지냈다. 동래부사 때는 관할 지역이 일본과 접경된 관문으로서 국방상 요지임을 절감하고 방비에 더욱 힘쓰는 한편, 당시 많은 폐단을 일으키는 일본의 구송사(九送使)를 폐지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듬해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충무위부사직(行忠武衛副司直) 등 여러 벼슬을 모두 사양하였으나, 10월 양주목사(楊州牧使) 겸 양주진병마첨절제사(楊州鎭兵馬僉節制使)로 제수되었다. 1692년부터 1698년까지 경주부윤(慶州府尹)과 양주목사 등 매년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노모봉양과 시묘(侍墓) 등의 이유로 사양하였으며, 1699년에 경주부윤(慶州府尹) 겸 경주진병마절제사(慶州鎭兵馬節制使)를 제수받았다.

1700년 날로 심해지는 조정의 붕당에 염증을 느끼고 벼슬을 버리고 경상북도 영천에 복거(卜居)하며 호연정(浩然亭)을 지었다. 1701년 제주목사(濟州牧使) 겸 제주진병마수군절제사(濟州鎭兵馬水軍節制使)를 제수받아 제주의 풍습을 유교적 풍속으로 바꾸는데 힘을 썼다.

즉 석전제(釋奠祭)를 행하던 삼읍(三邑)의 성묘(聖廟)를 수리하고 이름 높은 선비로서 선생을 정해 글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그리고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등 삼성의 사당을 세우고 동성혼인 등의 풍속을 금지하였고, 해녀들이 나체로 잠수하는 것을 금하였다.

또한 지방민들이 제주도 남부에 있는 한라호국신사(漢拏護國神祠)인 광정당(廣靜堂)에서 기도하던 풍습을 금지시켰으며, 이 밖에도 신당 129개를 모두 불태워 음사(淫祠)를 철저히 단속하고 미신적으로 흐르는 불교를 배척해 사찰을 불태우고 유교를 권장하였다.

이처럼 목민관으로서 학문을 진흥시키고 문화재와 고적을 수리·보존했으며, 미신적인 인습과 악습을 타파해 도민(島民)의 풍속 교화와 생활 개선에 힘썼다. 이에 당시 백성들은 송덕비 4개를 세워 그의 청덕(淸德)을 칭송했다고 한다.

1704년 제주목사를 그만두고 6월에 영천으로 돌아왔고, 1705년(숙종 31) 영광군수(靈光郡守) 겸 전주진병마절제사(全州鎭兵馬節制使)로 부임하였다. 이후 수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형상은 이처럼 고위 관직에 여러 차례 임용되었지만, 관리로서의 본분을 지켜 1796년(정조 20)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학문과 저술]

『병와집(甁窩集)』 외에 보물 제652호로 지정된 『선후천(先後天)』 3책, 『악학편고(樂學便考)』 3책, 『악학습령(樂學拾零)』 1책, 『강도지(江都志)』 2책,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 1책,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1첩, 『동이산략(東耳刪畧)』 1책, 『둔서록(遯筮錄)』 1책, 『복부유목(覆瓿類目)』 1책, 『정안여분(靜安餘噴)』 1책 등이 있다.

[묘소]

이형상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1리 앵자산 남쪽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호연정(浩然亭)이 남아있으며, 호연정 뒤에 병와유고각을 건립해 이형상 수고본[보물 제652호] 및 병와 이형상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

1735년 경상북도 영천시 오수동에 성남서원(城南書院)을 세워 제향하였으나 훼철되고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1829년 제주 유생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해 영혜사(永惠祠)에 추향(追享)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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