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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250
한자 郭䞭
이칭/별칭 양정(養靜),존재(存齋),충렬(忠烈)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전민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1년연표보기 - 곽준 출생
몰년 시기/일시 1597년연표보기 - 곽준 사망
활동 시기/일시 1954년 - 곽준 안음현감에 임명됨
묘소|단소 곽준 묘소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성격 충신
성별
본관 현풍
대표 관직|경력 자여도찰방

[정의]

조선 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충신.

[가계]

곽준(郭䞭)의 본관은 현풍.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이며, 1551년(명종 6)에 태어났다. 고조는 청백리 곽안방(郭安邦)이며, 증조는 진사(進士) 곽승화(郭承華), 조부는 곽미[郭(王+美)]이다. 부친은 곽지완(郭之完)이며, 모친은 초계 정씨(草溪鄭氏)로 진사(進士) 정옥견(鄭玉堅)의 딸이다.

첫째부인은 증(贈) 정부인(貞夫人) 전주 전씨(全州全氏)로 김기원(金基遠)의 딸이며, 둘째부인은 증(贈) 정부인(貞夫人) 광주 안씨(廣州安氏)로 안수공(安守恭)의 딸이다. 슬하에 2남2녀를 두니 아들은 곽이상(郭履常)과 곽이후(郭履厚)이며, 사위는 유문호(柳文虎)와 현감(縣監) 강준(姜遵)이다.

[활동 사항]

곽준배신(裵紳)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박성(朴惺)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 김면(金沔)의 휘하에서 활약하였으며,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하였다.

1593년(선조 26) 전쟁 중에 굶주린 군사가 들에 가득하니 곽준이 군량을 얻어 해결하였고, 1594년 조정에서 재능이 뛰어난 자를 발탁할 때 안음현감에 임명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으로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호남의 길목인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던 중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성이 함락되자, 8월 18일 두 아들 곽이상·곽이후와 함께 47세를 일기로 순절하였다.

[묘소]

곽준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서쪽 화산(花山)에 간좌(艮坐) 향으로 있다.

[상훈과 추모]

곽준이 사망하자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에 장계(狀啓)를 보내 병조참의로 추증되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정려를 받았다.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安義面)의 충렬사(忠烈祠)와 황암서원(黃巖書院), 그리고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 예연서원(禮淵書院)에서 제향하니 곽종석(郭鍾錫)이 찬양하여 말하기를 “학문에 근본하여 변란에 임하여 항상함이 있었네. 흰 칼날 밟음은 중용의 능함이니 아버지는 충성하고 자식은 효도하니 해와 달처럼 밝게 빛나리”라고 하였다.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우천리에 충렬공사당(忠烈公祠堂)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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