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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324
한자 鄭宜藩
이칭/별칭 위보(衛甫),백암(柏巖)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최미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0년연표보기 - 정의번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정의번 임진왜란 때 영천성, 경주성 전투 참가하여 공을 세움
몰년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정의번 사망
출생지 정의번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정의번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하천(夏泉)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세덕사(世德祠)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충효각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지도보기
성격 충신
성별
본관 영일

[정의]

조선 중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충신.

[개설]

고려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는 영일 정씨(迎日鄭氏)[오천 정씨]는 문과 급제 후 봉익대부행전공판서(奉翊大夫行典工判書)를 지낸 정인언(鄭仁彦)과 그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정광후(鄭光厚)부터 영천 전촌(錢村)에 옮겨 살았다.

[가계]

정의번(鄭宜藩)의 자는 위보(衛甫), 호는 백암(柏巖)이며, 1560년(명종 15)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노항리(魯巷里)에서 태어났다. 고조는 찰방(察訪) 정이휘(鄭以揮), 증조는 정차근(鄭次謹), 조부는 창릉참봉(昌陵參奉) 정윤량(鄭允良)이다.

아버지는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강의(剛義)라는 시호를 받은 정세아(鄭世雅)이며, 어머니는 일직 손씨(一直孫氏)로 현감(縣監) 손치운(孫致雲)의 딸이다.

부인은 영월 신씨(寧越辛氏)인 참봉(參奉) 신덕린(辛德麟)의 딸로 후사(後嗣)가 없어 아우 정수번(鄭守藩)의 아들 현감(縣監) 정호례(鄭好禮)로 뒤를 이었다.

[활동 사항]

정의번은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워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부모님께 먼저 드리고 나서 먹곤 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왜적의 침입으로 여러 고을이 함락되자 정의번은 부모님을 모시고 기룡산 아래로 피난을 가서 정안번(鄭安藩)과 정수번(鄭守藩) 두 아우와 더불어 수십 리 밖에서 소금과 쌀을 져다가 아침저녁으로 봉양을 하였다.

왜적이 승승장구하여 임금님이 멀리 북쪽으로 피난길에 오르고, 장수와 관리들이 적을 겁내어 도망치는 등 나라의 운명이 일대 위기에 처해지자, 아버지인 호수((湖叟) 정세아가 이르기를, “임금께서 피난을 떠나시고 나라 위태롭기가 너무나 급박한데 신하된 사람이 어찌 편안하게 앉아서 볼 수 있겠느냐?”하고 사방으로 의병을 모집하니 고을 사람들이 차차 합세하여 9백여 명에 이르렀다.

정의번은 항상 아버지를 모시고 기묘한 계책을 세워 화산면 ‘박소’에서 권응수정대임 등이 승리를 가두는 데 앞장섰으며, 각 고을에서 모여든 의병들과 연합해 전국 최초로 복성(復城)된 영천성 전투를 위해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을 조직해 큰 공을 세웠다.

영천성 탈환의 여세를 모아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참전을 하게 되었는데, 정의번은 늘 앞장서서 온힘을 다하여 공격하니 적진이 무너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갑자기 적군이 기병을 투입하여 아군의 뒤쪽을 공격하고, 앞쪽에 숨어있던 많은 적들이 일시에 공격을 해오자 아군들은 당황하기 시작하였으며, 주력부대인 관군이 잠시 후퇴하자 진영은 흐트러졌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 헤어지게 된 정의번은 사방으로 아버지를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자 다시 적진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습격을 하였다. 이 틈을 타서 아버지는 포위망을 벗어났으나, 이 사실을 모르는 정의번은 온몸이 창에 찔리면서도 적진 속에서 아버지를 찾아 헤매었다.

이렇게 적진을 수차례 드나들며 고군분투하였으나 수적 우세인 적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적진을 향해 쳐들어 갈 때 종인 억수에게, “아버지는 이미 전사하신 것이 분명하니 내가 어디로 돌아가겠느냐? 너는 나와 관계없이 떠나거라”하였다.

억수가 말고삐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주인님이 아버지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셨는데, 소인이 어찌 혼자 살 수 있겠습니까?”하며 끝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방으로 적에게 포위를 당한 정의번은 결국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고, 억수 또한 주인과 같이 전사를 하였다.

전투가 끝났지만 아들의 시신을 찾지 못한 아버지 정세아정의번이 평소 입던 옷과 갓으로 경주 싸움터에서 초혼(招魂)을 해 와서 빈소를 만들고 통곡을 하니 당시 뜻이 통하던 많은 사람들이 만시(輓詩)를 보내 왔다.

만시가 적힌 종이를 시신 대신 관에 넣고 선영에 장사를 지내니 후세 사람들이 이 묘소를 일컬어 시총(詩塚)이라 일컬었다. 또한 공의 묘소 아래에는 억수의 작은 무덤을 만들고 공의 후손들이 ‘충노(忠奴) 억수의 묘’라는 작은 빗돌을 세워 오가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1784년(정조 8) 임고면 선원마을에 왕명으로 ‘충효각’을 세우게 되어 오늘날에도 정의번의 충효 정신을 길이 잇고 있다.

[묘소]

정의번의 묘소는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하천(夏泉)에 있으며, 오광운(吳光運)이 찬(撰)한 시총비(詩塚碑)가 있다.

[상훈과 추모]

정의번은 우순사(右巡使) 김성일(金誠一)의 장계로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증직되었다가, 1612년(광해군 4)에 현손 정중기(鄭重器)의 상소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세덕사(世德祠)를 세워 제향하며, 1784년(정조 8) 왕명으로 임고면 선원마을에 ‘충효각’을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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