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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 교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808
한자 明珠敎會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운북로 1459[명주리 352-2]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손산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명주 교회 설립
이전 시기/일시 1926년 - 명주 교회, 명주동에서 고지동으로 이전
이전 시기/일시 1927년 - 명주 교회,고지동에서 다시 명주동으로 이전
최초 설립지 명주 교회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명주리
현 소재지 명주 교회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운북로 1459[명주리 352-2]
성격 교회
설립자 아담스
전화 054-337-9004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명주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교회.

[개설]

명주 교회는 영천 지역의 초기 교회로서 성장의 기초가 잘 다져진 교회이다. 아직도 농촌 교회로서는 드물게 교회의 조직과 기반이 튼튼하다. 그러나 단단한 지역성을 바탕으로 성장을 거듭하였으면서도 보존하고 있는 역사 자료가 거의 없어 영천 지역의 초기 교회로서의 그 역사성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변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경북교회사』 등 교회 외부 문서에 따르면 명주 교회는 아담스(J. E. Adams) 선교사에 의해 1906년에 성립·조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선교사가 설립 주체가 되어 상부 기관에 보고한 시점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실제 교회의 연원은 좀 더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박기진은 이 지역 최초의 교인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기독교를 수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장터에서 대장장이로 일했던 그가 선교사 이전에 명주 교회 설립에 관여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므로 교회의 시작은 1906년 이전 어느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 초가 6간의 예배당을 지은 명주 교회는 영수가 된 박기진을 중심으로 교회의 기초를 다져갔다. 그러나 박기진 영수의 별세 후 1926년도에 고지동으로 교회를 옮겼다가 그 이듬해 다시 명주동에 돌아와 교인들이 연보하여 임병재 영수의 밭에 초가 4간의 두 번째 예배당을 건축하고 입당 예배를 하였다. 그 연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교회를 이전했다가 1년도 못되어 다시 돌아온 것으로 보아 교회 내부에 다소의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교인 수는 약 42명 정도였다.

이후 1950년대에 이르러 교회가 점차 부흥되자 늘어나는 교인들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1959년에 114명의 교인들이 합심 연보하여 현재 교회의 위치에 35평 목조 함석집 예배당을 신축하고 12월에 헌당식을 하였다. 이때부터 교회는 본격적으로 성장하여 1976년에는 예배당을 20여 평 증축하였으나 다시 증가하는 교인들로 예배당이 부족하자 1992년 현재의 예배당을 새롭게 건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멀리 원곡에서 출석한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상동 교회가 1980년에 분립·개척되기도 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명주 교회는 이전부터 교회와 지역을 위한 교육 사업과 청년회 활동이 활발한 교회였다. 그러나 근자에 이르러 농촌 지역의 침체에 따른 교세 감소와 환경 변화로 인해 이전의 지역을 위한 역동적인 사업과 활동을 지속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명주 교회는 주로 교회의 내실을 다지는 신앙 교육과 전도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현황]

산업화 이전 대부분의 농촌 교회들이 그러했듯이 명주 교회 역시 마을의 중심에서 교회 조직을 통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 특히 1953년 3월 10일에 설립된 성경 구락부[장로교 선교사인 킨슬러(F. Kinsler)[권세열] 목사가 1929년 평양에서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우 청소년을 돕기 위해 시작]는 지역 아동 교육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당시 강철수 전도사와 황해영 집사는 전후(戰後) 어려운 사정으로 취학 연령이 되었는데도 교육을 받지 못하는 지역 아동들의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 사업을 시작하였다.

성경 구락부의 교육 과정은 초등학교 4년 과정으로 국문 해독, 편지쓰기, 기초적인 수학 등이었다. 당시 1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종교·지육·체육·봉사라는 4대 목표 아래 열심히 교육을 받았다. 차츰 전후 사회가 안정되어 가고 학생들이 일반 학교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인해 전국 교회에 산재한 성경 구락부는 오래지 않아 폐교가 되었다.

명주 교회 성경 구락부에서도 폐교될 때까지 약 8년 동안 6회에 걸쳐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명주 교회에서는 교회 내 면려회(勉勵會) 조직을 통해서도 지역 사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활동을 많이 하였다.

2006년 4월 23일 명주 교회는 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교회와 지역을 섬긴 신앙의 전통은 오늘에도 그대로 이어져 100여 명[담임 목사 1명, 시무 장로 5명]의 교인들이 예배와 교육과 전도와 봉사의 열정을 갖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의의와 평가]

명주 교회의 지난 모습은 산업화 사회 이전에 꾸준히 성장을 거듭한 꽤 규모 있는 농촌 교회의 전형을 보여준다. 별다른 커다란 내부 어려움 없이 지역성을 바탕으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한 가운데 지역 사회를 위한 사업, 특히 교육 사업에 큰 공헌을 한 교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촌 교회와 마찬가지로 명주 교회 또한 지역 인구의 감소로 인한 교세 감소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면 소재지도 아닌 농촌 교회로서는 아직도 규모 있는 교회의 모습을 갖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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