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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2001
한자 永陽誌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단행본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간행 시기/일시 1935년연표보기 - 『영양지』 간행
간행처 영천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 46-1 지도보기
성격 민간 발행 읍지
저자 정형식(鄭瑩植)
번역자 번역작업 안됨
간행자 영천향교(永川鄕校)|정형식(鄭瑩植)

[정의]

1935년 정형식(鄭瑩植)이 편찬하고 영천향교(永川鄕校)에서 간행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읍지.

[개설]

『영양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문묘(文廟)와 관련된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향안(鄕案)이며, 맨 마지막에는 간기(刊記)가 실려 있다.

읍지의 가장 첫 부분은 문묘위차(文廟位次)로, 그것은 다시 대성전(大成殿)·동배위(東配位)·서배위(西配位)·동종향(東從享)·서종향(西從享)·동무(東廡)·서무(西廡)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종향(西從享) 항목까지는 중국의 유자(儒者)가,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항목에는 우리나라의 유학자가 기재되어 있다.

문묘위차(文廟位次) 항목 다음으로는 석전대제홀기(釋奠大祭笏記)가 수록되어 있고, 마지막으로는 축문(祝文)이 실려 있다. 문묘 관련 부분에서는 판심제(版心題)가 ‘영양지(永陽誌)’였으나, 향안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에서는 ‘향안 영양지’로 기록되어 있다.

향안 항목에는 만력삼십구년구월십삼일(萬曆三十九年九月十三日)부터 시작하여 그 이후에 작성된 향안들이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다.

만력(萬曆) 39년 1611년(광해군 3)에 작성된 향안에는 88명이 입록(入錄)되어 있고, 4년 뒤인 1615년 2월 3일에 작성된 향안에는 96명의 인사가, 다시 4년 뒤인 1619년 12월에 작성된 향안에는 116명의 인물이 입록되어 있다.

1635년(인조 13)의 숭정을해중수소록(崇禎乙亥重修所錄)은 앞의 향안들이 4년마다 작성된 것과는 달리 16년 만에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95명의 인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5년 뒤인 1640년 숭정경진중수소록(崇禎庚辰重修所錄)에는 유학(幼學) 박사신(朴士愼) 이하 140명의 인물들이 입록되어 있고, 이후 25년 뒤에 작성되는 을사십월소록(乙巳十月所錄)의 향안에는 124명이 기재되어 있다. 1665년(현종 6)에 작성된 이 향안에는 좌수(座首)·도약정(都約正)·부약정(副約正)·직월(直月)을 담당하는 인물들을 싣고 있으며, 연호를 기재하지 않은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이후의 향안은 모두 이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후 5년 뒤인 1670년(현종 11)에 작성된 경술십월이십삼일소록(庚戌十月二十三日所錄)에는 입록된 인물들이 대폭 줄어들어 26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 향안에 따르면 당시 도약정(都約正)은 성하룡(成夏龍), 부약정(副約正)은 정시상(鄭時相), 좌수(座首)는 서행근(徐行謹), 직월(直月)은 손만록(孫萬祿)이었다.

경술십월이십사일소록(庚戌十月二十四日所錄)의 경술년은 앞서의 향안이 작성된 해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약정 이하의 인물들이 모두 동일하였다는 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도약정은 성하윤(成夏胤)으로 성하룡과 같지 않으나, 부약정 이하의 인물들이 모두 동일한 것을 볼 때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이 향안에는 10명의 인물들이 입록되어 있다.

다음 향안은 1673년 계축정월이십육일소록(癸丑正月二十六日所錄)으로, 96명의 인물들이 실려 있고, 도약정·좌수·부약정·직월을 역임하는 인물들이 기술되어 있다.

다음은 계축구월이십일소록(癸丑九月二十日所錄)인데, 이 향약에 기재된 인물이 11명인 점으로 미루어 앞의 향안과 동일한 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677년의 정사오월이일소록(丁巳五月二日所錄)에는 147명의 인사들이 입록되어 있고, 도약정·부약정·좌수·직월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다음 해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오윤삼월십오일소록(戊午閏三月十五日所錄)에는 13명이 수록되어 있고, 2년 뒤 경신십일월십오일소록(庚申十一月十五日所錄)에는 8명의 인물 및 도약정 이하의 인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 1686년에 작성된 병인십이월초십일소록(丙寅十二月初十日所錄)에는 단지 2명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는 공사원(公事員)·좌수·별감(別監)을 담당한 인물들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다음 해로 추정되는 1687년에 작성된 정묘팔월십팔일소록(丁卯八月十八日所錄)에는 192명의 인물들이 입록되어 있고, 공사원 이하의 임원들도 기술되어 있다.

이어 무진사월이십사일소록(戊辰四月二十四日所錄), 경오십이월이십육일소록(庚午十二月二十六日所錄), 신미칠월일일소록(辛未七月一日所錄), 신미십일월이십일일소록(辛未七月一日所錄) 등이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향안에는 각각 2명·1명·3명·2명 등 소수의 인물만이 입록되어 있다.

1712년(숙종 38) 임진정월삼일소록(壬辰正月三日所錄)에는 55명의 인물들이 수록되어 있고, 병신사월십이일소록(丙申四月十二日所錄)에는 113명의 인물들이 입록되어 있다.

2년 뒤의 무술십이월이일소록(戊戌十二月二日所錄)에는 19명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고, 기해정월삼일소록(己亥正月三日所錄), 경자오월삼일소록(庚子五月三日所錄), 갑진삼월사일소록(甲辰三月四日所錄)에는 각각 6명·18명·18명의 인물들이 입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1731년(영조 7) 신해이월구일소록(辛亥二月九日所錄)에는 114명의 인물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청금안(靑衿案)으로 불리고 있다. 이처럼 총 26건의 향안이 시간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간기에 의하면, 1935년에 정형식(鄭瑩植)이 편집(編輯)하고, 영천향교(永川鄕校)에서 발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기존의 문묘위차·석전대제홀기·축문·향안 등을 모아 『영양지(永陽誌)』로 편집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편찬/간행 경위]

영천 사람들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구하고 평화로울 땐 논과 밭을 갈고 글을 읽어 집안을 살찌우며 인격을 도야했다. 또 문화와 예술을 숭상했기 때문에 읍지의 중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1930년대 향교가 중심이 되어 기존의 향안 등을 묶어 읍지를 작성한 이유는 영천 지역 사족(士族)의 후손들이 자신의 조상이 이 지역의 양반이었던 점을 대외적으로 알려 지역 사회 내에서 자신의 사회적 위세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지적 상황]

『영양지』는 표지·문묘위차(文廟位次)·석전대재홀기·축문·향안(鄕案)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형태]

『영양지』는 지리지 8권 4책과 향안 1책 등 전 5책으로 구성된 석판본 5책 완질본이다.

[구성/내용]

『영양지』는 영양향안(永陽鄕案)·영양지 인(仁)·영양지 의(義)·영양지 예(禮)·영양지 지(智) 등 전 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양지』에 기록된 사찰]

은해사(銀海寺)는 군의 서쪽 40리 팔공산에 있으며, 813년(신라 헌덕왕 4)에 창건을 명하여 원당을 축복하기 위해 ‘해안(海眼)’이란 이름을 내렸다. 1264년(고려 원종 5)에 원참조사가 거조암으로부터 와서 모금을 하여 절을 수리하고 법당과 당간을 설치하였다. 1289년(고려 충렬왕 15)에 왕사인 보자존자[홍진국사]가 크게 확장을 함으로써 세상에 도량으로 드러났다.

1544년(인종 원년)에 천교화상이 해안사를 이건하여 현 위치로 옮겨짓고 은해사라 사액하였다. 산내에는 운부·백흥·중암·묘봉·기기·백운·서운·거조·백련 등의 암자가 있으며, 산외에는 영지·진불·죽림·묘각·수도·부귀·봉림이 영천에, 인각·수태·신흥이 군위에, 태전·보광·수정이 청송에, 유금·장륙이 영덕에, 금정·주사·도덕이 경주에 있는데 다 여기에 속했다. 동왕 18년(계해년)의 실화로 익년인 갑자년에 묘진대사가 중건하였으며, 1589년(선조 22)에 법막대사가 의연·광심 두 대덕과 더불어 모금을 하여 동·서 법당과 각 요사체를 넓혀 새로 지었다.

1840년(헌종 13)에 다시 불에 타고 본군의 군수 김기철이 방백에게 의연금을 청하고 스스로 도와 팔봉화상과 더불어 대화주인 해월화상과 여러 중들이 힘을 합하여 법당과 종각 및 요사체를 지었다. 순종 기미년에 주지인 석담화상이 대중과 더불어 크게 중수를 하였다.

백흥암(百興菴)은 본사의 중봉 5리에 있으며, 874년(신라 경문왕 13)에 혜철국사가 창건하였다. 그 후 경순왕견훤의 난을 피하여 이 절에 머물 때 이 절의 산에 잣나무 열매가 많이 나는 연유로 인해 백지사(栢旨寺)라 칭하였고, 조선 인종 병오년에 암자의 이름을 백흥난야(百興蘭若)로 고쳤다.

서운암(瑞雲菴)·백운암(白雲菴)은 본사의 서쪽 협곡 2리에 있으며, 천교화상이 본사를 이건할 때 함께 창건하였다. 암자의 위에 백운이란 폭포가 있다.

기기암(寄寄菴)은 옛날 안흥사(安興寺)로 본사의 서쪽 8리에 있으며, 신라 헌덕왕 8년(병신년)에 정수대사가 창건하였으며, 후에 1546년(인종 3)에 기성대사가 이 암자에 주석할 때 몸은 사바세계에 의지하고 뜻은 극락에 의지한다는 의미로 기기암으로 고쳤다.

거조암(居祖菴)은 본사의 서북쪽 20리에 있으며, 신라 경덕왕 때 창건을 명하고 오백나한상을 봉안한 나라의 복을 빌던 사찰이고, 백련암(白蓮菴)은 본사의 서쪽에 있으며 인종 때 창건하였으며, 운부암(雲浮菴)은 본사의 진산 우측 협곡 10리에 있고 712년(신라 성덕왕 10)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

상용암(上聳菴)은 백흥암의 서쪽 봉우리에 있으며, 710년(신라 흥덕왕 8)에 심지왕사가 창건하였으나 지금은 없고, 충효암(忠孝菴)은 백흥암의 서쪽에 상충효암과 하충효암의 옛 터가 있다. 신라 경순왕이 상용암에 있을 때 시종 및 문·무관이 있던 곳이나 지금은 없다.

중암암(中巖菴)은 상용암의 동봉에 있으며 심지왕사가 창건한 즉 상용암의 전향각을 높은 바위 위에 중창하였으며, 입구에 석문이 있고 그 위에 동석[건들바위]이 있다.

영지사(靈芝寺)는 군의 남쪽 40리에 있으며, 옛 이름은 웅정사(雄井寺)이다. 한나라 오봉 원년에 창건하였으며, 후에 옥잠선사가 전각을 중창하였으나 임진란에 병화되고 남아있는 것을 지산 조호익 선생이 지조·항찬 등과 더불어 중건하였다. 조호익이 시를 짓고 서문을 지어 기록한 후에 수리하거나 중창한 사실을 알지 못하며, 후에 주지 지석담 화상이 일하·일봉·일허 등과 힘을 합쳐 새로 중건하였다.

죽림사(竹林寺)는 본사의 동 30리 유봉산록에 있으며, 신라 심지왕사가 창건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해마다 정원에 대나무를 심어 기복을 드려 말하기를 대나무 열매가 있는 곳에는 봉황이 스스로 와서 아름다운 소리로 운다고 하여 죽림사라 이름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여, 고종 경신년에 향약의 의연금으로 중수하였다.

묘각사(竗覺寺)는 군의 북쪽 40리 기룡산에 있으며, 신라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

거동사(巨洞寺)는 군의 북쪽 60리 보현산에 있으며, 정종 21년에 중창하였고, 선흥사(善興寺)는 군의 동 30리 청경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정각사(正覺寺)는 군의 북쪽 60리 모자산에 있으며, 삼귀암(三歸菴)은 군의 동쪽 40리 천장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수도사(修道寺)는 본사 서북쪽 50리에 있으며, 신라 선덕왕 14년(정미년)에 원효·장 양 조사가 창건하였는데 수석 등의 경치가 팔공산에선 최고이다. 고려 충렬왕 병신년에 보조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순조 을축년에 비구 징월의 사문인 정훈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갑자년에 주지 범해가 자비로 중수하였다.

진불암(眞佛菴)은 본사 서북쪽 40리에 있으며, 고려 문종환암혼수국사가 창건하였으며, 1637년 서경 사람 이응선이 중수하였으며, 1813년(순조 13) 수리하고, 1860년에 주지 석담화상이 자비로 중창하였다.

부귀사(富貴寺)는 군의 서쪽 50리 팔공산에 있고, 불굴사(佛窟寺)는 군의 서쪽 40리 무학산에 있으며, 절 뒤 바위틈에 약천이 있다. 법화사(法華寺)는 군의 북쪽 60리 보현산에 있었으나 현재는 없으며, 봉림암(鳳林菴)은 군의 북쪽 40리 학서산에 있고, 정수암(淨水菴)은 군의 북쪽 40리 경림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크기]

『영양지』는 18.9㎝×28㎝이다.

[의의와 평가]

『영양지』의 발간으로 말미암아 1930년대 영천 지역사람들이 순박한 인심으로 학문을 숭상, 일찍이 향토문화를 빛낸 고장이자 충의의 고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읍지는 일반적인 읍지와는 달리, 인문지리·자연지리·부세행정과 관련된 항목 등이 보이지 않고, 문묘 관련 항목과 향안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문묘가 향교 내에 위치한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읍지의 구성은 향교에서 읍지를 편찬하였던 것과 관련 있다고 판단된다. 아울러 향안 등도 향교를 중심으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듯 이 읍지는 일제시기 재지(在地) 사족층 후손들의 신분·계층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으며, 향안 등은 이 지역을 살피는 자료로서 이용할 수 있다.

1611년(광해군 3)부터 1731년(영조 7)까지를 대상으로 한 26건의 향안들을 통해, 향안이 작성되는 추세와 그 의미를 살필 수 있으며, 또한 좌수 등의 향임(鄕任)을 역임한 인물들을 파악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1611년 이후 영천 지역 사족 층의 구성과 변화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 국립중앙도서관(http://www.dibrar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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