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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2089
한자 -信仰
이칭/별칭 동제,당고사,동고사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은정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풍년을 위해서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마을 신앙은 동제·당고사·동고사라고도 하는데, 지역 사회에서는 ‘동제(洞祭)’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을 신앙이라는 용어는 지역 주민들이 이야기하는 동제를 보다 학술적으로 객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동제는 마을 공동체의 풍작을 기원하면서 주민들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민간 신앙으로서 동제는 크게 유교식과 무속식이 있는데, 영천 지역의 동제는 대부분 유교식에 해당한다. 이것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 유교적인 이념이 민간에까지 뿌리를 내려 정착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근대화되기 이전의 사회, 즉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 늘 어려웠다. 오늘날에는 과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농사와 직결되는 기상 정보, 전염병에 대한 예방과 같은 일이 가능하졌지만, 동제가 마을 사회에서 중요한 위상을 점유할 때만 해도 세상은 늘 예측 불가능한 사회였던 것이다. 이렇게 불안하고 두려운 세상에 대해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따라서 공동체 신(神)인 마을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질서, 풍작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제의로 표현하는 하는 그것이 바로 동제라고 볼 수 있다.

[절차]

일반적으로 마을신을 모시기로 한 시간이 되면 마을 안팎을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하고 정성껏 대접하며 때로는 여흥을 즐기기도 한다. 마을신이 사람들의 정성을 받아들이게 되면, 독축관(讀祝官)은 마을 전체를 위해서 축문(祝文)을 읽고 각 가정과 개인의 소원을 소지(燒紙)에 담아 마을신에게 빌게 된다. 이렇게 축문과 소지를 통해 소원 성취를 빌게 되면 마을이 무사태평하고 안녕할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대개 유교식 기제사와 함께 이루어지며, 동제가 끝나고 난 뒤에는 이웃 간 음복(飮福)을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게 된다.

[현황]

영천시에서 2012년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동제는 대략 20여 곳을 약간 상회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물론, 이번에 파악하지 못한 곳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근 2~3년 이내에 전승이 단절된 동제가 많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사회적 요구가 전통적인 문화의 전승과 단절에서 또 하나의 변화 국면을 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천시에서 2012년 현재 동제를 모시고 있는 곳을 행정구역별 단위로 분류해 본다면, 금호읍에서는 구암리·대미1리·대미2리 세 곳에서, 고경면에서는 석계리·상리리·용전리 세 곳에서, 신녕면에서는 완전1리 하관, 연정1리 두 곳에서, 자양면에서는 보현3리 송정용산리 두 곳에서 동제가 전승되고 있었다. 또 북안면에서는 유상1리에서 동제가 전승되고 있었고, 임고면에서는 수성1리 구만쉼터, 양항1리에서, 대창면에서는 신광1리, 오길1리에서, 화북면에서는 오산2리 운산, 정각1리 절골, 죽전1리 직딩에서, 화산면에서는 당지2리, 대안1리에서, 화남면에서는 대천1리 대미 동제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영천시 도심 내의 문외동에서도 동제가 전승되고 있었으며, 화북면에서는 마을신앙이 확대된 개념인 면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편, 대평리 동제와 덕암리 동제, 보현1리 기우제, 부산1리 핏골 동제, 삼산리 산수골 동제, 충효3리 동제, 치산1리 동제, 고천리 동제, 덕연리 동제, 도암리 동제, 도유리 동제, 부리 동제, 삼매리 동제, 신호리 동제, 운천리 동제, 전사리 동제, 내포리 동제는 모신 적이 있으나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영천시에서 전승되고 있는 동제 20여 곳의 가장 큰 변화는 동제 날짜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동제 모시는 날짜의 변화는 단지 시간 차원의 의미 변화가 아닌, 동제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전통적으로 영천시에서는 음력 정월 14일 밤 12시가 되어서야 동제를 모시는 경우가 많았고, 이 외에도 삼월 삼짓날, 정월 초순경과 같이 다양한 날짜를 정해 동제를 모셔왔다. 그러다가 동제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변화되어 가면서 공고했던 동제 날짜와 제사 시간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동제 모시는 날짜의 변화는 각 마을마다 처한 사정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양면 보현3리 송정마을의 경우는 원래 삼월 삼짓날에 동제를 모시다가 2005년부터는 정월 보름날 아침 7시경에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는 농림부가 선정한 녹색 농촌 체험 마을로 보현리가 선정되면서부터의 변화라고 한다. 체험 마을이 되면서 동제를 모시는 날짜를 변화시킴으로써 체험객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임고면 수성1리 구만쉼터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9일 정일에 동제를 정성껏 모시다가 백중날로 바꾸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엄격한 제사가 아닌 고유(告由)로 지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음력 7월 15일 백중날은 바쁜 농번기에 하루 신나게 노는 날로서 이날 동제를 대신한 고유를 지내고 동민 전체가 하루 종일 여흥과 휴식을 하기로 합의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창면 오길1리 동제는 마을 당숲에 있는 돌무덤에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유교식 기제사 형식으로 모셔오다가 약 10여 년 전부터 동제 날짜를 양력 5월 8일 어버이날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동제를 주관하던 마을 노인들이 점차 돌아가시고 있지만, 정작 젊은 세대는 동제의 의미를 어르신들만큼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어버이날에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하기에 앞서 간단하게 고유만 하게 되었다.

화북면 정각1리 절골마을에서는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밤 열두 시에 선정된 제관 한 사람이 동제를 엄숙하게 모셔 왔다. 그 무렵 이후부터는 정월 대보름 아침 여섯시 경으로 날짜와 시간을 바꾸어 마을 주민 모두가 참가한 가운데 동제를 모시게 되었다. 왜냐하면, 농촌의 과소화 현상에 따라 주민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제관을 선정하는 일이 무척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2011년부터는 정월 대보름이 아닌 양력 8월 15일로 동제 날짜를 변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정월 대보름에는 정각리 마을 전체의 윷놀이와 회의가 개최되기 때문에 절골마을 주민도 여기에 참석해야 해서 부득이하게 동제 날짜를 변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농사일이 조금 한가해지는 8월 15일에 동제를 모시고 나서 마을 주민들끼리 화합을 도모하면서 한바탕 놀기로 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자양면 보현3리 송정 동제는 삼월 삼짓날에서 정월 대보름으로, 수성1리 구만쉼터는 정월 9일에서 백중날인 7월 15일로, 대창면 오길1리에서는 정월 대보름에서 어버이날인 5월 18일로, 화북면 정각1리 절골마을에서는 정월 14일 밤 12시에서 정월 대보름 아침 여섯 시로 바꾸었다가 2011년부터는 양력 8월 15일로 동제 날짜를 변화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날짜의 변화가 아닌, 엄숙한 제사 형식의 동제를 벗어나고 마을 주민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화합의 날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동제의 날짜 변화가 있는 마을에서는 동제 자체의 의미에 비중을 두기 보다는 마을 주민이 하루 즐기기에 앞서 마을신에게 고하는 고유(告由)의 의미가 훨씬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영천시에서 전승되는 동제 가운데 이러한 고유의 의미가 가장 크게 부각되는 곳은 오산2리 운산마을 동제인데, 주민들은 동제라 부르지 않고 ‘고유’라고 부르고 있다. 운산마을은 간소하게 동제를 모시고 나서 마을회관 앞 도로에서 줄당기기를 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운산마을에서는 곳나무싸움도 했었지만 2006년 이후로 전승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운산마을에서 줄당기기가 지속되는 배경에는 특별한 사연이 전해지는데, 1970년대에 줄당기기를 중단하자마자 마을의 청년이 죽어 나가는 피해가 발생하게 되었고, 철학관에 찾아가서 물어보니 줄당기기를 중단한 데서 원인이 있다고 하여 다시 줄당기기를 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 더 이상의 우환은 없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영천시의 동제는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최근 1~2년 사이에 중단된 마을도 여러 곳이 있었지만, 이런 마을의 당수나무는 여전히 신성한 영역으로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제가 전승되고 있는 마을의 경우는 주민들이 현재의 사회적 요구에 적합한 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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