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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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康純 |
이칭/별칭 | 태초(太初),곡천부원군(谷川府院君),산양군(山陽君),장민공(莊敏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390년 - 강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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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50년 - 강순 조전절제사로 북방 방어 |
활동 시기/일시 | 1460년 - 강순 모련위야인(毛憐衛野人) 정벌에 종군 |
활동 시기/일시 | 1467년 - 강순 이시애의 난 평정 |
활동 시기/일시 | 1467년 - 강순 여진족 토벌 |
활동 시기/일시 | 1467년 - 강순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 1등에 녹훈, 우의정 산양군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68년 - 강순 선영에 분황 |
몰년 시기/일시 | 1468년 - 강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18년 - 강순 우의정 남공철의 건의로 신원 |
추모 시기/일시 | 1871년 - 강순 장민공 시호 추증 |
거주|이주지 | 세거지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갈현리 산수동마을 |
묘소|단소 | 강순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도흥리 산26 |
성격 | 무관 |
성별 | 남 |
본관 | 신천 |
대표 관직 | 우의정 |
[정의]
조선 전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소탕해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로 사형을 당해 보령시에 묻힌 명장.
[개설]
강순(康純)[1390~1468]은 조선 전기의 명장으로 일찍이 북방 방어 능력을 인정받아 세조(世祖)[재위: 1455~1468]의 총애를 받았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여세를 몰아 북방의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우의정으로 있을 때에 보령현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뵙고 선영에 분황(焚黃)하였다. 1468년 유자광(柳子光)[1439~1512]의 무고(誣告)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가계]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태초(太初), 증조할아버지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1396]의 아버지이다.
[활동 사항]
강순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버이가 병이 깊어지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주어 간호하였고, 장성한 후에는 효행과 청렴으로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갔다. 1450년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평안도 박천(博川)에서 북방 방어에 전념하였고, 1458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0년 설치된 영북진의 도호부사(都護府使)로서 진의 성을 쌓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 뒤 신숙주의 모련위야인(毛憐衛野人) 정벌에 종군해 공을 세웠다. 이듬해 함길도 도절제사가 된 뒤, 1465년 중추원사로 전임될 때까지 5년 가까이 북방 방어에 힘쓰면서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1467년 이시애가 세조의 북방민 통치 정책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진북장군(鎭北將軍)이 되어 어유소(魚有沼), 남이 등과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이 무렵 여진족 건주위(建州衛)의 추장 이만주(李滿住)가 도발하자 강순은 서정장군(西征將軍)이 되어 남이, 어유소 등과 압록강을 건너 건주위의 동북쪽 파저강(婆猪江) 올미부(兀彌部)의 여러 곳을 소탕하였다. 강순은 그 공을 인정받아 우의정 산양군(山陽君)에 제수되었고,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며, 곡천부원군(谷川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강순의 어머니가 충청도 보령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성묘를 하기 위하여 보령에 왕래하였다. 이에 세조는 이조와 병조에 명하여 말미를 주고 역말과 의원을 보냈으며, 잔치를 배풀어 주었다. 1468년 유자광이 남이가 반역을 꾀했다고 무고하였는데, 강순도 함께 연루되어 사형을 당하였고, 보령 청연역(靑淵驛) 뒷산에 안장되었다.
강순의 후손들은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갈현리 산수동마을에 세거지를 마련하여 살아오고 있다. 이곳에는 강순의 후손들이 문중의 상징으로 심고 기른 산수동 소나무가 있다.
[묘소]
묘소는 원래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 관산리에 있었는데, 관산리에 대우자동차대학이 들어서면서 보령시 미산면 도흥리 산26번지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강순은 1818년(순조 18)에 이르러 우의정 남공철(南公轍)[1760~1840]의 건의로 신원(伸冤)되었고, 1871년(고종 8) 장민공(莊敏公) 시호가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