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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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晋昕 |
이칭/별칭 | 자과(子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충청수영의 수군절도사로 병자호란에 참전한 조선 후기의 장수.
[개설]
강진흔[1592~1637]은 병자호란 중 충청수사로 충청수영의 배와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강화도 방비에 책임이 있는 자들이 방비를 게을리하고, 강진흔이 갑곶에서 분전하는 모습을 보고도 돕지 않아 끝내 패전하였고, 그 책임으로 참형을 당하였다.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과(子果)이다. 『금양잡록(衿陽雜錄)』으로 유명한 강희맹(姜希孟)이 강진흔의 6대조이고, 아버지는 장예원사의 강세경이다.
[활동 사항]
강진흔은 26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광해군(光海君)[재위: 1608~1623]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은둔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仁祖)[재위: 1623~1649]가 즉위하자 곧바로 선전관겸비변랑(宣傳官兼備邊郞)에 뽑혔고 조금 뒤에 도총도사(都摠都事)로 승진하였다. 1636년 충청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어 보령의 충청수영으로 부임하였다.
1637년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종묘사직(宗廟社稷)과 비빈대군(妃嬪大君)이 모두 강화도로 피난하자 강진흔은 강화도가 자신의 관할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충청수영의 군선 7척과 수군 200명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강화도의 검찰사 김경징(金慶徵)과 부찰사 이민구(李敏求)는 강진흔과 충청수군을 홀대하였고, 홀로 갑곶을 지키던 강진흔과 충청수군은 청군을 만나 분전(奮戰)하였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강진흔의 충청수군은 청의 군선 수 척을 격파하였다. 강진흔과 충청수군이 분전 중일 때 주사대장(舟師大將) 장신(張紳)이 거느린 수군이 갑곶을 지났다. 장신은 강진흔이 이끄는 충청수군보다 훨씬 많은 수군을 이끌고 있었는데, 상황이 급박한 것을 보고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패전의 죄를 논하는데, 강화도 패전의 책임을 물어 장신은 자진(自盡)하고, 김경징은 경계, 이민구는 영변, 강진흔은 이산(理山)으로 귀양을 보냈다. 여러 달이 지나, 한 달이 넘는 논쟁 끝에 김경징은 사사(賜死)하고, 강진흔은 참수가 결정되었다. 강진흔의 억울한 사형에 충청수영의 제장(諸將)과 관리와 사졸(士卒)들이 대궐 앞에 나아가 엎드려 목 놓아 울며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