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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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永肩 |
이칭/별칭 | 석재(石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나주목사 재직 시 기근 해결에 힘쓴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이영견(李永肩)[1403~1482]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나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기근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가계]
본관은 수안(遂安), 호는 석재(石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완(李完), 할아버지는 이갑인(李甲仁)이다. 아버지는 이구로(李求魯)이며, 어머니는 이모(李謩)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영견은 일찍이 생원이 되고, 1429년(세종 11) 27세 나이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42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있을 때에 양녕대군(讓寧大君)[1394~1462]이 매사냥을 하는 행차를 접대한 고을 수령들의 죄를 고하였고, 조정 안에서 소란을 피운 각 품관(品官)에 대해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다.
내직의 요직을 거쳐 1445년 이조정랑이 되고, 1447년 병조정랑으로 연분답험(年分踏驗)[세금을 매기기 위하여 실제로 생산 현장을 조사함]을 하기 위해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1454년(단종 2) 좌사간·우사간을 거쳐, 1456년(세조 2)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이어서 예조참의·이조참의를 거쳐 1464년 인수부윤(仁壽府尹)이 되었다.
1470년(성종 1)부터 4년간 나주목사로 재직하였는데, 이때 심한 흉년이 들자 자신이 목격한 처참한 지역 상황을 성종(成宗)[재위: 1469~1494]에게 상소하고, 이를 방치하는 관찰사의 징계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성종의 명령으로 전라도 여러 고을의 관리들을 조사하고 가려내어 자급(資級)[관료의 직품(職品)과 관계(官階)]을 강등하고 장(杖) 60~80대의 벌을 내렸다. 그러나 재직 중에 기근이 들었는 데도 고을에 장(場)이 열린 것을 금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보령의 수안 이씨는 청소면 진죽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죽하마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 요산군(遼山君) 이기(李蘷)[?~?]의 사당 요산사(遼山祠)가 있다. 이기가 고향 수안을 떠나 보령으로 낙향하면서 이 지역에 수안 이씨의 터전이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