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00
한자 鄭曄
이칭/별칭 시회(時晦),수몽(守夢),문숙(文肅)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3년연표보기 - 정엽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정엽 별시문과 병과 급제, 홍문관 문한직(文翰職)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정엽 정유재란 때 수원 방비에 전력
활동 시기/일시 1602년 - 정엽 종성부사로 좌천
활동 시기/일시 1608년 - 정엽 예조참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9년 - 정엽 대사성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0년 - 정엽 충청감사 임명, 화암서원 건립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정엽 성균관을 크게 일으킴.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정엽 이괄의 난 때 공주 파천 주장
몰년 시기/일시 1625년연표보기 - 정엽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25년 - 정엽 우의정 추증됨
추모 시기/일시 1685년 - 정엽 기천서원 배향
사당|배향지 기천서원 -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초계
대표 관직 우의정

[정의]

임진왜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등에서 활약한 조선 후기 문신.

[개설]

정엽(鄭曄)[1563~1625]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임진왜란 때 수원을 방비하고, 이괄의 난에는 인조(仁祖)[재위: 1623~1649]의 공주 파천을 제기하였다. 충청도관찰사 재임 중 화암서원을 건립하였다.

[가계]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정희년(鄭熙年), 할아버지는 정선(鄭璇)이다. 아버지는 진사 정유성(鄭惟誠),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 尹氏)로 증찬성 윤언태(尹彦台)의 딸이다. 장인은 영의정 이산보(李山甫)[1539~1594]이다.

[활동 사항]

정엽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1517~1578]의 주선으로 송익필(宋翼弼)[1534~1599]에게서 수업하고, 이이(李珥)[1536~1584]의 초전문인(初傳門人)이었으며, 성혼(成渾)[1535~1598]과 송익필에게도 배워 기호성리학의 계열을 이었다.

1566년 4세 때 이이가 이웃집에서 정엽을 처음 만났는데, 글을 줄줄 외우는 정엽을 보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1578년(선조 11) 16세에 충청남도 보령에 세거하는 한산 이씨 이산보(李山甫)[1539~1594]의 딸과 혼인하였다.

1583년(선조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홍문관의 문한직(文翰職)을 맡았다. 1587년 감찰·형조좌랑이 되었으며, 1593년 황주판관으로 왜군을 격퇴, 그 공으로 중화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1594년에는 보령에서 조상을 마치고 있던 중 수찬(修撰)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가던 중 예산에서 교지를 받았지만 곧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1595년 서천군수를 지냈다. 1597년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귀국 후 성균관사성을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수원은 당시 전란을 겪으며 큰 피해를 입고 있었으나, 군민을 잘 다스려 서천군수 때와 마찬가지로 주민들로부터 크게 칭송을 받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대사성을 거쳐, 1610년에는 충청관찰사가 되었다. 충청관찰사 시절 정엽이지함의 문인인 구계우(具繼禹)와 함께 보령현 청라[현 보령시 청라면]에 화암서원(華巖書院)을 건립하였다. 화암서원이지함이산보 등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며 이산보정엽의 장인이다. 정엽토정 이지함을 서원에 봉안한 후 토정에 대한 제문을 지었다.

1623년 인조반정 초에 비변사의 합사(合辭)로 대사성에 동지경연(同知經筵)·원자사부(元子師傅)를 겸하였으며,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켰다. 이후 곧 대사간에 제수되어 대사성을 그만두어야 했으나, 국왕의 특명으로 그대로 겸하게 되었는데, 대사성으로서 타직을 겸하는 예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다. 인조반정 이후 친명정책의 표방과 함께 후금에 대한 적극 정책으로 적의 침입이 있으면 국왕이 삼군을 이끌고 송도에 진주한다는 친정(親政)의 계책이 공식적으로 택해졌는데, 이 안이 정엽으로부터 나왔다. 또한,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 파천의 안을 과감히 제기한 것도 정엽이었다.

공주에 있을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고, 환도 후 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대사헌에 제수되고,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대사헌을 다섯 번 겸하고, 한꺼번에 네 가지 직임을 겸하여 격무로 병을 얻어 63세에 사망하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정엽은 자질이 영민하고 기국(器局)[사람의 재능과 도량]이 크며 또 경술(經術)에 능통하였고 관직에 임해 일을 처리하는 데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광해군 때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경기의 사저에 물러가 살면서 누차 관직을 임명받았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정엽은 경기도 여주 사람이지만, 보령 출신인 토정 이지함, 이산보와 교류하고 보령의 대표적 서원인 화암서원[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죽성로 411[장성리 산27-1]]을 건립하는 등 보령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수몽집(守夢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기천서원(沂川書院)[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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