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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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啓遠 |
이칭/별칭 | 자장(子長),약천(藥泉),충정(忠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서 은거한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조계원(趙啓遠)[1592~1670]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후 심양(瀋陽)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를 보좌하고, 소현세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 묘책을 내어 세자를 구하였다. 말년에 보령 탑동에 머물며 조정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가계]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자장(子長), 호는 약천(藥泉)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조준수(趙俊秀), 할아버지는 조남(趙擥),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존성(趙存性), 어머니는 이신충(李藎忠)의 딸이다. 부인은 신흠(申欽)의 딸이다.
[활동 사항]
조계원은 1616년(광해군 8)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고, 인조반정 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 진사 입격 시 방목(榜目)에 기재된 거주지는 한성[서울]이었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의 방목 또한 거주지를 한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조계원의 선대는 주로 경기도 양주에 세거하고 있었고, 현재 남양주시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조계원 또한 경기도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계원은 문과 급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내·외직을 두루 겸하였고, 병자호란 이후 1641년에 소현세자를 청나라 심양에서 보좌하는 등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는 삶을 살지 않았으므로 주로 한성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계원은 관직 생활 중인 162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1631년 잠시 파직되었다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었다. 사헌부장령(司憲府將令), 옥당(玉堂)[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쳤으며,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에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탄핵을 당하자 이를 힘써 구원하였다.
1641년 심양에 갔던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요구로 명나라의 진저우[錦州] 공격에 참가하게 되자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으로서 시종하고, 모래주머니를 이용해 성을 쌓는 기계(奇計)를 써서 세자 일행이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심양에서 돌아와 수원부사·홍청감사(洪淸監司)·동부승지·예조참의·강화유수·도승지·경상감사 등을 거쳤다. 전설에 의하면 홍청감사, 즉 충청도관찰사를 지낼 때에 지역을 순찰하다 전의현 지역에 좋은 자리를 봐두고 훗날 자신의 묘를 그곳에 쓰게 하였다고 한다.
1654년(효종 5)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경기감사·전라감사, 함경감사, 형조참판, 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1662년(현종 3) 형조판서에 이르러 사직하고, 충청남도 보령의 탑동에 은거하였다. 그 뒤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현종실록(顯宗實錄)』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졸기(卒記)에 “나이 70이 된 뒤에는 보령에 물러가 살다가 죽었으니.... 고향에 살면서도 근신하지 않았으므로 탄핵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라는 내용이 보인다. 1743년(영조 19)에 조태만(趙泰萬) 등이 간행한 『양주 조씨 족보』 초간본[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에도 조계원이 임인년에 물러나 보령 탑동에서 지내다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들 조진석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어 조계원에게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었으며, 1767년 다섯 아들이 모두 문과와 무과에 오르자 예관을 보내어 차제(差除)[벼슬에 임명]하고 영의정을 더 추증하였다.
후에 조계원의 자손들은 양주 조씨 충청공파 종중을 구성하면서 경기도, 충청도 등으로 거주지를 넓혔다. 조계원에게는 아들 7형제가 있었는데, 이 집안은 숙종·정조 시대에 걸쳐 그 세력의 절정을 이루었다. 7형제 중 둘째 조구석(趙龜錫), 셋째 조희석(趙禧錫), 넷째 조사석(趙師錫), 다섯째 조가석(趙嘉錫) 등 4형제의 후손이 번창하였다. 숙종(肅宗)[재위: 1674~1720] 때에는 같은 집안이면서도 노·소론(老少論) 양파로 갈라져 당쟁의 극렬상을 보여 주었다. 조희석의 후대는 노론으로, 조사석과 조가석의 후대는 소론으로 갈라져 집안끼리 갈등이 벌어졌다. 넷째 아들 조사석은 선영을 따라 전의 송정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에 정자를 짓고 거주하면서 그 후손이 전의 지역에 세거하게 되었다.
조계원의 묘지명은 박세채(朴世采)[1631~1695]가 짓고, 신도비는 송시열(宋時烈)[1607~1689], 행장은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지었는데, 당대 최고의 서인계 관료들이었다.
[묘소]
묘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정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76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1685년 시호 충정(忠靖)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