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09
한자 蔡裕後
이칭/별칭 백창(伯昌),호주(湖洲),문혜(文惠)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99년연표보기 - 채유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채유후 개시문과 장원 급제 및 홍문관 보임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채유후 병자호란 때 집의(執義)로 인조 호종
활동 시기/일시 1641년 - 채유후 광해군 호상(護喪)을 맡음.
활동 시기/일시 1646년 - 채유후 강빈폐출사사교문(姜嬪廢黜賜死敎文)을 지음.
활동 시기/일시 1653년 - 채유후 『인조실록』 편찬 참여로 가자(加資)됨.
활동 시기/일시 1657년 - 채유후 『선조수정실록』 편찬 참여
활동 시기/일시 1659년 - 채유후 『효종실록』 편찬 참여
활동 시기/일시 1660년 - 채유후 대사헌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60년연표보기 - 채유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61년 - 채유후 숭정대부(崇政大夫) 좌찬성 추증
부임|활동지 활동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묘소|단소 채유후 묘소 -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평강
대표 관직 대사헌|대제학|예조판서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

[개설]

채유후(蔡裕後)[1599~1660]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문재(文才)가 뛰어나 『인조실록(仁祖實錄)』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재위: 1623~1649]를 호종하였으며, 광해군(光海君)[재위 1608~1623]이 제주도에서 사망하자 호상(護喪)을 맡아 보았다. 채유후는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잘 썼으며 평생 벼슬살이를 하여 당대 명사들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가계]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창(伯昌), 호는 호주(湖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채난종(蔡蘭宗), 할아버지는 채경선(蔡慶先), 아버지는 진사 채충연(蔡忠衍)이다. 어머니는 순흥 안씨 현령 안사열(安士說)의 딸이다.

[활동 사항]

채유후의 집안과 충청남도 보령의 인연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지만, 보령 성주산 아래에 집안의 묘역이 조성된 시기가 채유후의 동생 채진후 대부터로, 1600년대 중반 보령을 왕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직 생활을 위하여 주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채유후가 1615년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1621년과 1623년 두 번의 문과에 급제할 때의 방목(榜目)을 보면 거주지는 한성[서울]이다. 채유후의 종손(從孫) 채팽윤(蔡彭胤)[1669~1731]이 남긴 시 중에 중형의 보령향장(保寧鄕庄)이란 글 “청명에 할아버지 산소에 절을 올리니 만감이 든다[淸明拜王父墓志感]”에 ‘보령의 진평(保寧榛坪)’이라고 붙은 주기 등을 보면 채유후의 동생인 채진후(蔡振後)를 평강 채씨 보령 입향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채유후는 어릴 때부터 문재가 뛰어났으며, 17세에 생원이 되고, 1623년(인조 1) 개시문과(改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보임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고, 김류(金瑬) 등의 강화 천도 주장을 반대하고 주화론(主和論)에 동조하여 구금되었다가 1638년 석방되었다. 1641년 광해군이 제주도에서 사망하자 예조참의로서 호상을 맡아 보았으나 행상(行喪)할 때 담군(擔軍)에게 백건(白巾)을 쓰게 하였다는 탄핵을 받자 병을 빙자하여 사임하였다.

1646년 이조참의로서 지제교(知製敎)가 되어 모두가 싫어한 「강빈폐출사사교문(姜嬪廢黜賜死敎文)」을 지어 다시 현용(顯用)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강빈사건에 반대 입장이었으므로 집에 돌아와 사륙전서(四六全書)를 모두 불태워 버릴 만큼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어 대사간, 병조참의, 동부승지, 부제학·대사성·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효종(孝宗)[재위: 1649~1659]이 즉위한 뒤에도 대사간, 이조참판, 대제학,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예조판서·우참찬 등을 역임하고, 이후 이조판서가 되어 대제학을 8년 겸임하였다.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내던 중 술에 취하여 실의(失儀)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현종(顯宗)[재위: 1659~1674] 즉위 후 1659년(현종 즉위년) 성절사(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대사헌에 올랐으나 유계(兪棨)[1607~1664]의 탄핵으로 사임하고, 공조참판·내국재조(內局提調)를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병으로 죽었다.

『현종실록(顯宗實錄)』의 졸기(卒記)에는 성품이 깨끗하고 글솜씨가 뛰어났는데, 술을 너무 좋아하는 게 문제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의 졸기도 대개 유사하며, 채유후가 스스로 벼슬 맡기를 좋아하지 않고, 위아래를 거스르지 않았다는 평가가 추가되었다.

채유후의 시는 담박한 언어로 자신의 심회를 자연스럽게 표출한 당시풍을 띠고 있는 작품이 많으며, 평생을 벼슬살이를 하여 관객문인(館閣文人)의 삶과 정서 및 당대 명사들과의 교유가 잘 드러난다. 보령의 청라동 의평리 새터에 평강 채씨의 후손들이 세거해오고 있다.

[학문과 저술]

시조 2수가 전하며, 저서로 『호주집(湖洲集)』이 있다.

[묘소]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실록 편찬의 공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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