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19 |
---|---|
한자 | 金憲昌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강종원 |
[정의]
남북국 시대 신라의 시중, 청주도독, 웅주도독을 역임한 왕족으로 보령 지역에 세거한 후손들의 호응을 받은 반란의 주모자.
[개설]
김헌창(金憲昌)[?~822]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603~661]의 후손으로 신라 하대에 고위 귀족관료로 활동하였으나 822년에 웅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한때 9주 5소경 가운데 4주 3소경이 김헌창의 세력권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한 달 만에 진압되었다. 웅진성이 함락될 당시 김헌창은 자결하였고, 반란의 핵심 관련자 239명은 처형되었다.
[가계]
태종무열왕의 6세손인 아찬 김주원(金周元)의 둘째 아들이다.
[활동 사항]
김헌창은 신라 하대의 초기에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애장왕(哀莊王)[재위: 800~809] 대인 807년 시중으로 임명되었으며, 헌덕왕(憲德王)[재위: 809~826] 대인 813년에는 무진주도독(武珍州都督)이 되었다. 이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814년 시중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퇴임하였다. 816년에는 다시 청주도독(菁州都督)이 되었고, 821년 웅주도독(熊州都督)으로 전보되는 등 주로 외방의 관직을 지냈다.
822년 김헌창은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구실로 웅주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기존의 반란과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여 신라 왕조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국가를 지향하였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자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와 국원소경, 서원소경, 금관소경이 자발적으로 호응하였다. 신라의 9주 5소경 가운데 4주 3소경이 김헌창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이들 지역은 대부분 백제와 가야의 옛 영역이었는데, 평소에 차별적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란은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신라의 진압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김헌창은 자결하였다. 825년(헌덕왕 17)에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한강 이북의 고달산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보령 지역은 김인문의 봉지(封地)였으므로 일찍부터 김인문의 후손들이 낙향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김인문의 직계손이었던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구실로 김헌창이 난을 일으켰을 때 보령 지역에 세거하고 있던 후손들도 호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헌창의 난은 신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누적된 결과로 일어난 것으로 신라에서 중앙귀족 출신자가 국가를 대상으로 삼아 지방민을 규합하여 일으킨 유일한 반란이었다. 그리고 지방에서 호족세력의 등장과 왕위계승 쟁탈전을 더욱 심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