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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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永國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정전리 548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을경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7월 15일 - 강영국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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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 강영국 보령 지역 3·1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46년 4월 4일 - 강영국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3년 - 강영국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정전리 548 |
활동지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 |
묘소 | 강영국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정전리 산94-5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3·1운동 참여 |
[정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하였던 충청남도 보령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강영국(姜永國)[1878~1946]은 보령 출신으로 1919년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 3·1운동을 김사구와 함께 주도한 인물이다.
[활동 사항]
강영국은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3월 10일경 같은 마을 친구인 김사구와 함께 주동이 되어 보령 지역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한 후 함께 참여할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인근 지역을 돌며 동참할 주민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김사구는 3월 17일에 청소면 성연리의 김재두·한기석·이병철을, 3월 25일에는 동면 정전리의 박제건, 3월 27일에는 성연리의 임경진, 3월 30일에는 성연리의 고광춘을 만나 3·1운동을 위하여 꽃놀이를 가장하여 비밀리에 4월 10일 신태중의 집에 모이자고 협의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신태중의 집에 강영국을 비롯하여 8명이 모였을 때 강영국과 김사구는 “다른 군에서는 독립운동을 위하여 산에 봉화를 올리고 여러 사람이 모여 만세를 부르는데, 보령에서는 이러한 운동에 착수하는 자가 없으니 우리가 주도하여 궐기하자.”라고 하면서 동지들을 설득하였다. 뒤이어 “우선 보령리 진두산에 봉화를 올리고 독립 만세를 외친 후 청소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직원들도 시위 운동에 참가시키자.”라고 주동하면서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박제건과 고광춘이 반대를 표명하면서 설득되지 않아 애초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으며, 8인의 회동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4월 12일 체포되었다. 결국 강영국은 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다시 8월 7일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묘소]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정전리 산94-5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강영국의 공훈을 기려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