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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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坡平 尹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문광균 |
입향지 | 파평 윤씨 입향지 -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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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시조 | 윤신달(尹莘達) |
입향 시조 | 윤황(尹璜) |
[정의]
윤황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이거 성씨.
[개설]
파평 윤씨(坡平 尹氏)는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워 고려 개국공신에 책록된 윤신달(尹莘達)[893~973]을 시조로, 윤황(尹璜)[?~?]을 입향조로 하는 이거 성씨이다.
[연원]
윤신달과 관련해서는 파평현 용연에 있던 옥함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부이므로 그전의 다른 이야기나 모습은 알 수 없으며, 윤신달의 후손들이 파평현을 근거지로 삼아 토착화하여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파평 윤씨는 고려 전기 때 가문의 번성을 이루어 유명한 문벌귀족 중 하나가 되었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문과 급제자는 418명, 정승은 11명이나 배출한 큰 성씨로 성장하였다. 이후 윤황(尹璜)이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증산리 송림으로 입향하게 되었다.
[입향 경위]
윤황은 명종 대인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피하여 많은 일족들과 피신하게 되었는데, 이때 송림으로 입향하게 되었다. 윤황은 후사가 없어서 형의 아들인 조카 윤필은(尹弼殷)[1684~ ]을 양자로 삼았다. 윤필은의 형 윤명은(尹明殷)[1642)~1718]은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전라감사를 사직하고 동생이 양자로 가 있는 송림에서 어머니를 모셨다. 이후 윤명은은 다시 경기도로 돌아갔지만 윤필은은 계속 송림에 세거하였다.
윤필은은 후손이 없어서 친척 윤성을 양자로 들이고 난 뒤에 손자 윤사주(尹師周)를 얻었다. 윤사주는 3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3명의 부인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친척 중에 9세손 윤광수(尹光壽)를 양자로 들였고, 윤광수는 아들 윤휴진(尹休進)을 낳았다. 윤휴진은 아들 윤기(尹錡), 윤호(尹鎬), 윤전(尹銓) 3형제를 두었는데, 현재 송림 파평 윤씨 3파를 이룬다. 첫째 아들 윤기와 셋째 아들 윤전은 송림과 서면 마량리 등에 세거하고, 둘째 아들 윤호는 논산에 근거를 두고 있다.
[현황]
2015년 통계지리정보서비스 본관 인구 분포 조사에 따르면, 충청남도 보령시에 거주하는 파평 윤씨는 1,519명인 것으로 파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