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8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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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保寧 聖住寺址 大郞慧和尙塔碑 |
영어공식명칭 | Stele of Buddhist Monk Nanghye at Seongjusa Temple Site, Boryeong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8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정성권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2년 12월 20일 -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국보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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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8 |
성격 | 탑비 |
관련 인물 | 낭혜화상 무염 |
재질 | 귀부[화강암]|이수[화강암]|비신[흑대리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486.6㎝[전체 높이]|263.8㎝[비신 높이]|156.6㎝[비신 너비]|41.9㎝[비신 두께] |
소유자 | 국가 |
관리자 | 보령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국보 |
[정의]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을 개창한 낭혜화상 무염을 추모하기 위해 통일 신라 후기 성주사에 건립된 탑비.
[건립 경위]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大郞慧和尙塔碑)는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800~888]이 888년(진성여왕 2)에 입적하자 낭혜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행적을 모아 건립한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821년(헌덕왕 13) 당나라로 유학을 간 후 845년(문성왕 7)에 귀국하였다. 이후 보령의 성주사에서 40여 년 동안 주석(住錫)하였으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開山祖)가 되었다.
[위치]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에서 서쪽으로 8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형태]
이수(螭首)[머릿돌], 비신(碑身), 귀부(龜趺)[받침돌]를 모두 갖춘 전형적인 통일 신라 탑비이다. 탑비의 전체 높이는 486.6㎝이다. 탑비는 귀부가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1974년 보수하였다. 이수는 화강암 단일석으로 제작되었다. 이수 전면에는 운룡문(雲龍門)이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이수 전면 중앙에는 방형의 제액(題額)이 있으나 글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비신은 이수와 달리 보령 성주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남포오석(藍浦烏石)을 사용해 만들었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263.8㎝, 너비 156.6㎝, 두께 41.9㎝이다. 비신의 비문은 5,120자이며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다. 자경(字徑)은 2.5㎝이다. 비면과 글자가 새겨진 상태 모두 양호하여 글자 전체를 판독할 수 있다. 비신의 받침부인 귀부는 용두의 머리에 거북의 몸체를 하고 있다. 귀부는 좌측면과 용두 부분의 파손이 심한 편이나, 유려한 조각 솜씨를 귀부의 장식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금석문]
탑비의 비문에는 낭혜화상 무염의 행적이 모두 5천여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다. 비문의 찬자(撰者)는 최치원(崔致遠)[857~?]이며, 글을 쓴 서자(書者)는 최인연(崔仁兗)이다. 비명을 찬술하라는 왕명을 받은 시기는 무염이 입적하고 2년이 지난 890년(진성여왕 4)인데,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한 시기는 890년에서 897년 사이로 알려져 있다.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한 후 탑비가 실제 건립된 시기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한 직후인 890년대에 건립되었다는 의견과 최치원이 비문을 작성하였지만 탑비의 건비(建碑)는 경명왕 때 이루어졌다는 의견 등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의의와 평가]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는 통일 신라 시대에 세워진 석비 가운데 화려한 조각 기법이 돋보이는 가장 큰 탑비이며,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가장 긴 비문이다. 비문의 내용은 낭혜화상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를 면면이 조명할 수 있어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낭혜화상의 불교 공부 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통해 당시의 불교 학풍을 연구할 수 있고, 헌안왕 등 국왕들에게 자문할 때 유교 경전을 인용한 대화를 통해 당시 불교와 유교의 관계를 비교할 수 있다. 또한 낭혜화상의 집안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 진골 가문에서 육두품(六頭品)으로 강등되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는데, 신라 시대 골품제와 관련된 용어와 내용은 신라 골품제(骨品制) 연구의 핵심 사료로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