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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항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12
한자 義兵抗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권대웅

[정의]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한말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무력 투쟁.

[개설]

의병 항쟁(義兵抗爭)은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나라의 부름을 받기 전에 스스로 일어난 민군(民軍)의 무력 투쟁을 말한다.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은 민군이다. 나라가 위급하면 바로 의병이 일어나는데 조정이 명령하는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적개(敵愾)하는 자이다. [중략]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이다.”라고 정의하였다.

[활동상황]

의병 항쟁은 1894년(고종 32)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일제의 한국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갑오변란(甲午變亂)과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 그리고 1895년 11월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896년 경상북도 지방에서도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과 격문이 각 지역 향교를 중심으로 돌았는데, 영천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재 영천향교(永川鄕校)에는 모두 네 건의 의병 격문과 통문이 남아 있다. 1896년 1월부터 2월 사이에 발해진 것으로 보이는 네 건은 격문(檄文)·통문(通文)·애통조(哀痛詔) 등 세 건이며, 그리고 한 건은 영천향교의 임고회중(臨皐會中)에서 향내 각처로 발송한 통문(通文)이다.

그 중에서 진주의진(晉州義陣)에서 발한 것으로 보이는 통문, 관동 창의장 민용호(閔龍鎬)의 격문, 안동 창의대장 권세연(權世淵)의 격문, 그리고 국왕 고종의 애통조는 을미 의병의 창의(倡義) 경위를 파악하는 데 매우 시사적인 자료이며, 통문은 영천 지역에서도 창의를 위한 유림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영천 지역에서도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였다. 산남의진은 대장 정용기가 체포된 이후 중군장 이한구(李韓久)가 지휘하다가 1906년 7월 하순 해산하였다.

그 후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4월 재기하여 죽장·입암·포항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7년 9월 1일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장 정용기와 장령 다수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1907년 9월 아들을 대신하여 대장이 된 정환직(鄭煥直)은 청송의 보현산(普賢山)과 영일의 동대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환직은 일본군의 추격과 탄약 및 식량의 부족으로 해산하였고, 1907년 12월 청하면 각전(角田)에서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정환직이 순국한 후 최세윤(崔世允)이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대장에 취임하였는데, 최세윤산남의진을 산악 지대로 분산 배치하여 1908년 7월까지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산남의진은 영천을 비롯하여 청송·의성·경주·영일 등 경북의 동남부 일원에서 활동한 영남 지방의 대표적인 의병 부대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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