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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영천지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34
한자 新幹會永川支會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7년 9월경연표보기 - 신간회 영천지회 창립
관련사항 시기/일시 1927년 10월 - 신간회 영천지회 영천 덕암동 폭행 사건에 앞장섬
관련사항 시기/일시 1928년 2월 15일 - 신간회 영천지회 신간회 창립 1주년 기념식 거행
최초 설립지 영천청년동맹회관 - 경상북도 영천시
성격 민족운동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 있었던 신간회 소속 지회.

[개설]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1927년 2월 15일 창립된 신간회는 1931년까지 존속하였다.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와 2~4만의 회원을 두고 있었다.

경상북도의 경우 1927년 6월부터 1929년 7월까지 신간회 김천지회를 시작으로 모두 21개의 지회가 결성되었으며, 회원은 3,400여 명이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 9월경 창립된 신간회 영천지회도 그 하나였다.

[설립 목적]

신간회 영천지회신간회 본부의 활동 방향에 따라 지역의 각 사회단체와 연계를 맺으며 사회활동과 민족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었다.

[변천]

신간회 영천지회는 1927년 8월 17일 영천청년동맹 회관에서 신간회 설치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회원 모집을 시작하였다. 준비위원회는 위원장 차치준(車致駿), 서기 김석천(金錫天), 위원 김태연(金泰衍)·김달석(金達錫)·이용수(李〇守)·백기호(白基浩)·정시명(鄭時鳴) 등이다.

1927년 9월경 신간회 영천지회가 창립된 이후 제2회 정기대회가 영천청년동맹 회관에서 임시집행부를 조직한 뒤, 신임 간사회를 선거하고 부서를 결정하였다. 회장 이기용(李起龍), 부회장 이광백(李光白), 서무부 총무간사 구영석(具榮奭)·간사 김석천(金錫天), 재정 총간사 김성수(金盛守)·상무 하수득(河壽得), 정치문화 총무간사 김현직(金現稷)·상무 백신애(白信愛), 조사연구 총간사 이범교(李範敎)·상무 정시명(鄭時鳴), 조직 총간사 최영원(崔英遠)·상무 공의권(孔義惓), 선전 총간사 차치석(車致奭)·박영홍(朴英洪), 〇영간사 김영갑(金英甲)·김〇수(金〇秀)·김태연(金泰衍)·손병진(孫炳珍) 등이다.

1928년 2월 15일 영천청년동맹 회관에서 신간회 창립 1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신간회 영천지회의 경우에도 1927년 10월 영천군 화산면 덕암동에서 화산주재소 순사부장 영광번일(永廣繁一)이 노파를 구타한 ‘영천덕암동폭행사건’에 관여하여 영천 지역 각 사회단체가 경고문을 발송하는데 앞장섰다. 이러한 신간회의 활동에 대해 영천경찰서 북안주재소장 길전(吉田)은 1927년 10월 신간회 영천지회 회원 서모(徐某)로 하여금 사람들을 음해하도록 하여 신간회 가입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1928년 8월 영천군 번영회 창립총회에서 신간회 영천지회의 부지회장 이광백(李光白)이 번영회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의의와 평가]

신간회 영천지회는 창립 이후 일제 식민정책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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