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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897
한자 城山烽燧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덕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철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조선 전기 - 성산 봉수 건립
폐지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성산 봉수 폐지
소재지 성산 봉수 터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덕리 봉화산 일대지도보기
성격 봉수
지정 면적 전체 둘레 87m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덕리 봉화산 정상에 있는 조선 시대 내지봉수대 터.

[개설]

봉수는 봉(烽)[횃불]과 수(燧)[연기]로 변경의 군사정보를 정해진 신호체계에 따라 중앙과 주변지역에 전하던 통신방법이었다. 봉수제는 고대 삼국 시대부터 원시적으로 활용되었으나 정례화한 것은 고려 시대였다.

이후 조선 세종대에 크게 정비되어 1894년까지 국가적인 운영을 하였다. 조선 시대 봉수제는 노선 상으로 기간 봉수인 직봉(直烽)과 보조 봉수인 간봉(間烽)으로 구별하거나, 봉수대의 설치 지역과 기능에 따라 경봉수(京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로 나눈다.

경봉수는 조선 시대 전국의 봉수가 집결하였던 봉수로 서울 남산의 목멱산봉수를 이르며, 연변봉수는 지방의 해안 및 변경지역의 최 일선에 설치되었던 봉수였다. 내지봉수는 내륙 각지에 설치되어 서울의 경봉수와 변경의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던 중간봉수로 조선 시대에는 주로 복리봉수(腹裏烽燧)로 불렀다.

성산 봉수는 봉수노선과 성격상 부산 다대포진 응봉 봉수(鷹峰烽燧)에서 초기(初起)하여 서울 목멱산(木覓山)[남산] 봉수로 전달되던 제2로 직봉노선의 내지봉수이다. 대응봉수와 노선은 조선 전기에는 남동쪽 영천시 쌍계동 소재의 성황당 봉수(城隍堂烽燧)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북쪽 영천시 신령면 부산리여음현 봉수(餘音峴烽燧)로 보냈으나 조선 후기 새롭게 청통면 계지리구토현 봉수(仇吐峴烽燧)가 증설되면서 이곳으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변천]

성산 봉수가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방산 봉수성황당 봉수, 소산 봉수보다 조금 늦은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부터이며, 이후 전시기의 각종 지지서(地誌書)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초축 시기는 조선 전기이고, 1894년(고종 31) 전국 봉수제도가 철폐되면서 폐지되었다. 봉수 명칭은 조선 전시기를 통하여 변동 없이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위치]

성산 봉수(城山烽燧)영천시 청통면 신덕리 서편의 해발 291.1m인 봉화산 정상부에 있는데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현황]

조선시대 내지봉수대에는 통상적으로 연조(煙竈)·방호벽·봉수군 주거·고사(庫舍) 등 봉수군이 주어진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기본시설이 갖추어졌다. 현재 청통면 신덕리 서편의 해발 291.1m인 봉화산 정상부에 있는 성산 봉수는 영천 지역의 봉수 중 유구의 보존상태가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가장 온전한 편이다.

방호벽을 통해 본 봉수대의 평면 형태는 북서-남동을 장축으로 하는 타원형이다. 봉수대의 규모는 장축 26.2m, 단축 20.2m, 전체 둘레 87m 정도이다. 출입구는 개방식 형태로 남쪽 방호벽을 폭 4.3m가량 절개하여 1개소 시설하였다. 방호벽은 서쪽과 북쪽 부분이 가장 잘 남아있고 남동쪽은 대부분 망실되었으나 봉수대 운영 당시에는 4면을 모두 석축으로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호벽의 잔존 높이는 약 1.2~1.6m이며, 잔존 폭은 0.8~1.0m 정도이다. 방호벽의 구조는 자연 할석을 이용하여 외면을 돌로 쌓고 그 안쪽은 작은 할석과 흙으로 채워 넣어 축조하였다.

봉수 내부는 북고남저형 경사지를 이용하여 상하 2개의 공간으로 분리하였는데, 연대(煙臺) 등의 거화시설은 상단에 배치하였다. 상·하단의 높이차는 1.9m 정도로 두 공간의 통행은 서측에 난 경사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상단에 설치된 연대는 평면이 원형(圓形)으로 하부지름 12m, 높이 2~3m 정도이며, 상부에 설치되었던 연조는 붕괴되어 그 구조를 알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성산 봉수는 현재 영천 지역의 봉수 중 유구의 보존상태가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가장 양호하며 방호벽·출입구·연대 등이 잘 남아있다. 특히, 거화시설로 연대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연변봉수에서 축조했던 것으로 지금까지 내지봉수에서는 문경 탄항봉수 정도에서만 확인되는 아주 드문 사례이다. 따라서 성산 봉수는 우리나라의 내지봉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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