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06
한자 趙存性
이칭/별칭 수초(守初),용호(龍湖),소민(昭敏),정곡(鼎谷)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제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4년연표보기 - 조존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0년 - 조존성 증광문과 병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3년 - 조존성 대교 복직 및 전적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7년 - 조존성 40여 만 섬의 군량미 운반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조존성 광해군의 생모 추존 반대로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조존성 형조참판, 호조참판, 부총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조존성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조존성 정묘호란 때 세자를 전주로 호종
몰년 시기/일시 1628년연표보기 - 조존성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30년 - 조존성 시호 소민(昭敏) 추증
거주|이주지 낙향지 - 충청남도 보령시 죽정동지도보기 다락골
외가|처가 외가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동
묘소|단소 조존성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양주
대표 관직 형조참판|호조참판|영의정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

[개설]

조존성(趙存性)[1554~1628]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가서 조선에서의 명군 철수를 중지시켰으며, 명군의 군량미 수송에도 큰 공을 세웠다. 광해군의 생모 추존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는데, 이때 외가가 있는 충청남도 보령에 은거하며 보령과 인연이 깊어졌다. 정묘호란 때에는 전주로 세자를 호종하였다.

[가계]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수초(守初), 호는 용호(龍湖) 또는 정곡(鼎谷)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성종(成宗)[재위: 1469~1494]의 부마인 조무강(趙無疆)이고, 할아버지는 판서에 추증된 조연손(趙連孫), 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조남(趙擥)이다. 어머니는 보령 화암서원에 배향된 이몽규(李夢奎)[1510~1563]의 딸이다. 조존성의 손녀는 인조(仁祖)[재위: 1623~1649]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활동 사항]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양주 조씨조존성의 아버지 조남(趙擥)이 보령의 세거 사족 경주 이씨 이몽규의 딸과 혼인하여 처가를 왕래하는 과정에서 입향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조존성은 1573년 20세 때 진사시에 입격하고, 1590년에는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사마방목(司馬榜目)과 문과방목(文科榜目) 모두 거주지는 한성[서울]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항복(李恒福)[1556~1618]·신경진(辛慶晉)[1554~1619] 등과 교류하고, 사관(史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다. 대교(待敎)로 승진하였으나 모함을 입어 파면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 머물다 이듬해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왕이 상주하는 궁궐을 떠나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에 가서 다시 대교로 복직되고, 곧 전적(典籍)으로 승진되었다. 예조좌랑·정언(正言)을 거쳐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병부상서 석성(石星)에게 조선에서 명군을 철수하려는 것을 중지시키고, 또 초황(哨黃) 수만 근을 가지고 와 그 공으로 직강(直講)으로 승진되었다. 1597년 어사로 군량미를 운반하였는데, 그 양이 무려 40여 만 섬에 이르렀다.

1601년 강화부사가 되었는데, 백성들에게 기와를 징발하여 자기 집에 수송한 폐단이 있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다시 성균관 사성(司成)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그 뒤 호남어사·충주목사·단산군수 등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광해군(光海君)[재위 1608~1623]의 생모 추존에 반대하다 파직을 당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형조참판, 호조참판,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검찰사(檢察使)로 왕을 공주로 호종(扈從)하였다. 그 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갈 때 분조(分朝)의 호조판서에 임명되어 세자를 따라 전주에 갔으나 돌아와 병사하였다.

조존성은 보령 화암서원에 배향된 이몽규의 외손으로 파직 후 보령 죽정동에 은거하였고, 아들 조계원(趙啓遠)[1592~1670)은 보령 탑동에서 말년을 보냈다.

[학문과 저술]

시조 4수가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소민(昭敏)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