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5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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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民保導聯盟 虐殺 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옥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을경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0년 7월 10일~12일 -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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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이어니재 경찰묘지 -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옥서리 |
성격 | 학살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국민보도연맹 |
[정의]
1950년 7월 국민보도연맹이 공산군의 남침으로 인하여 좌익으로 간주되어 보령 지역에서 학살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광복 직후 시기 대한민국 내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었을 때 보령 지역도 좌익계와의 마찰이 존재하였다. 1945년 9월 하순 장항에 있던 공산주의자 수백여 명이 대천 장날을 기해 시가행진을 진행하던 중 시장 상인들과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경찰서에 있던 경찰이 시위대를 폭주로 간주하여 발포하면서 3명이 사망하였는데, 보령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남조선 노동당 활동이었다. 이후 1946년 봄 대천 동대교 옆 대천천에서 ‘남조선 노동당 대회’가 열렸고, 김일성과 스탈린 만세를 외치는 군중집회가 남조선 노동당 대천군당위원장의 주도로 두 차례나 전개되었다. 이후 남조선 노동당의 활동은 지하로 전개되었다.
1946년 10월 대구 폭동 등 좌익 세력의 폭동과 소요가 급증하던 시기에 청소면 지서 습격과 미산면 도화담 지서의 경비 전화 절단, 주포면 진당산에 봉화를 올리고 대천농업고등학교에 인공기를 게양하는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 관련된 공산주의자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말미암아 정부는 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우익으로 전향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어 좌익 세력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충청남도의 국민보도연맹 결성은 1949년 12월 27일 대전에서 있었으며, 국민보도연맹 보령지부는 1950년 1월 26일 보령경찰서에서 자수자 162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장이 참석하여 결성식이 열렸다.
[경과]
국민보도연맹의 취지는 ‘보호하고 지도한다.’라는 의미였던 만큼 좌익에게 전향 기회를 통하여 용서하고 신분을 보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결성 목적과 다르게 공산군의 남침으로 정부가 후퇴하는 과정에서 모두 좌익으로 간주되어 학살당하는 일들이 벌어졌는데, 보령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하였고, 검속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은 보령시 대천동에 있는 보령농협 창고에 수용되어 있다가 이어니재로 끌려가 집단 학살을 당하였다. 학살 장소는 현재 경찰묘지 북쪽 골짜기인 알미골과 짚은골로 추정되고 있다. 학살 시기는 보령 지역에 인민군이 들어와 경찰이 철수하기 전인 1950년 7월 10일에서 12일 사이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당시의 참석자가 162명이었다는 자료를 통하여 학살 인원은 162명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62명 중 일부는 등급 분류에 따라 학살에서 제외되었을 경우도 있고, 예비검속에 불참하거나 도피하였을 가능성을 감안하여 162명보다는 적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과]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보령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비슷한 형태의 보복 학살을 파생시켰다. 1950년 7월 15일 보령 주산전투에서 철도경찰 10여 명이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포로들은 웅천면 인민위원회에 인계되었다. 인민위원회 소속 좌익 치안대는 1950년 7월 27일 오후 2시 이어니재에서 포로들을 총살하였다.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이어니재가 보령 지역 국민보도연맹원이 학살당한 장소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철도경찰이 학살된 장소가 같은 곳이라는 점은 보복 학살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의의와 평가]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해방 공간이라는 특수한 시기적인 배경에서 전개된 가슴 아픈 역사로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