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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003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민병곤

[개설]

치산 계곡(雉山溪谷)팔공산(八公山)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고 있다. 여름이면 팔공산의 수많은 골짜기에서 모인 물이 공산 폭포(公山瀑布)의 낭떠러지로 쏟아져 물안개를 뿜어낸다. 공산(公山)팔공산의 옛 이름으로 치산 계곡공산 폭포에 남아 있다. 치산 계곡팔공산의 정체성이 남아 있는 셈이다. 치산마을 사람들은 공산 폭포치산 폭포(雉山瀑布)라 부른다.

치산리는 ‘꿩산마을’로, ‘꿩산’에서 ‘공산’이 됐다는 팔공산 이름의 유래 중 하나를 간직한 마을이다. ‘꿩산’을 의미하는 ‘치산’은 치산 계곡치산폭포, 치산리 등 세 곳에나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우연일지는 몰라도 치산2리로 들어서기 전 치산 효령로 오른쪽에 꿩 농장이 있으며, 마을 들머리에는 꿩 요리를 파는 식당도 두 곳이나 있다.

[팔공산 이름의 유래 간직한 치산리]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雉山里)는 신라 때부터 ‘공산’으로 불린 팔공산 이름의 유래 중 하나를 간직한 마을이다. 본래 ‘꿩산’이나 ‘꽁산’을 한자로 표기해 ‘공산’이 됐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꿩산마을’인 치산리 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2010년 영천 문화원에서 발간한 『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 변천사』에는 “신암마을 입구 앞산에 꿩이 엎드려 있는 모양인 ‘복치형(伏雉形)’으로 되었기에 치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중리마을 주위의 지형이 마치 꿩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 하여 치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두 군데나 기록하고 있다.

치산1리에 있는 대한 불교 태고종 영지사 주지 이상열 스님은 “신암 앞산의 암벽이 꿩의 머리 부분이며 중리 동쪽 야산이 꼬리에 해당한다”며 “꿩이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백학리 뒤쪽에 매봉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치산2리 이장 임종도는 “중리 남쪽에 있는 귀천 서원 쪽이 꿩의 날개 부분에 해당하며 알을 품는 형상”이라고 말했다.

‘꿩산’을 제쳐 두더라도 치산리는 병풍을 두른 듯 웅장한 팔공산으로 둘러싸여 절경을 이룬다. 신녕면 소재지에서 치산 효령로를 따라 차를 달리다 봉화재를 지나 치산리에 들어서면 멀리 한 폭의 한국화처럼 아름다운 팔공산의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꿩산’을 생각하며 치산2리로 가는 치산교에서 보면 마을 뒷산에 또 한 마리의 큰 꿩이 앉아 있는 듯한 산세를 볼 수 있다.

[미나리마을의 정겨운 돌담]

치산2리로 가는 길옆 들녘에는 계단식 논에 돌로 쌓은 둑이 정겹다. 겨울에도 얼지 않은 마늘이 자라고 있으며, 곳곳의 비닐하우스에는 미나리가 파릇파릇 새싹을 내밀고 있다.

열한 개 농가가 총 1만여㎡의 논에서 청정 암반수로 재배한 치산 미나리는 2월 20일쯤부터 4월 초까지 출하된다. 봄이면 담백하고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일품인 미나리를 찾아 대구와 포항 등지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바람에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치산마을에 들어서면 우뚝 선 느티나무가 반긴다. 둘레가 어른 팔로 세 아름이나 되는 이 나무의 수령은 250년으로 표지석에 새겨져 있으나, 동네에서는 훨씬 더 오래 된 400여 년으로 추정한다. 마을 어른들은 의성 김씨들이 중리를 개척할 당시 이 나무를 심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리의 당나무로 정월 대보름날 아침 식전에 마을 지도자와 이장 등이 모여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이전에는 동제 때 풍물놀이도 함께 했으나 요즘엔 젊은 사람들이 거의 없어 간략하게 지낸다. 마을회관 위쪽의 산촌 생태 마을에 있는 당나무에도 동제를 지낸다. 과거 동제를 지냈던 치산 관광지 매표소 부근의 당나무는 사라지고, 치산2리 동쪽 야산의 당집은 폐허로 변했다.

치산마을로 들어서면 돌담으로 둘러싸인 시골 풍경을 볼 수 있다. 돌담은 마을 안길은 물론이고, 몇몇 현대식 건물을 제외한 동네 전체의 집에서 만날 수 있다. 치산2리 중간쯤에 있는 마을회관까지가 중리에 해당하며, 위쪽은 진곡이다. 치산2리 105가구 중 7~8가구는 외지인이며, 의성 김씨와 인동 장씨, 해주 최씨 등 10여 성씨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마을회관 위쪽에는 돌담과 모과가 어우러진 ‘산촌 생태마을’이 조성돼 있다. 2005년 산림청 응모 사업에 대상지로 선정돼 2006년부터 4년간 15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산촌 쉼터[149㎡], 산촌 체험장[99㎡], 산나물 재배장 4동, 마을 안길 돌담 425m 조성, 소공원 조성 등 여러 사업이 2010년 3월에 완공되었다. 도시인들이 숙박과 산촌 체험을 한곳에서 할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치산 돌담 모과마을 영농조합 법인에서 운영한다.

중리 남쪽 언덕에는 임진왜란 공신인 권응수(權應銖)[1546~1608] 장군을 제향한 귀천 서원(龜川書院)이 있다. 권응수 장군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 영천성을 탈환하는 등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2등공신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영천 신녕 출신으로, 호는 백운재(白雲齋)이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경덕사(敬德祠)라고도 불리는 귀천 서원은 1676년(숙종 2)에 창건됐으며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다시 복원됐다. 현재 정면 3칸의 영정각, 정면 4칸의 강당, 권응수 장군의 신도비(神道碑)와 비각(碑閣) 등이 남아 있으며, 신도비각 앞에는 금이 간 하마비(下馬碑)도 보인다.

치산마을 주민들은 마늘과 벼, 미나리를 주로 재배하고 있으며, 뒤쪽의 팔공산으로 인해 태풍 피해가 거의 없다고 한다. 영천 모과의 주산지로 마을 곳곳에서 모과나무를 볼 수 있다. 치산1리인 신암마을에 가면 계곡에도 모과나무들이 수북하다.

[팔공산의 비경 간직한 치산 계곡]

치산2리 마을을 지나 치산 관광지에 들어서면, 왼쪽 계곡을 따라 2010년부터 국민여가 캠핑장 조성이 한창이다. 영천시에서는 연간 14만 명이 찾는 이곳을 팔공산 도립 공원은해사(銀海寺), 사일 관광 온천, 그리고 보현산 천문대영천시 보현산 천문 과학관 등과 연계한 체류형 관광지로 개발 중이다. 면적 2만㎡에 캠핑용 트레일러 14대, 소공연장 및 족구장 등을 설치할 예정이다.

오른쪽 치산1리 신암마을 입구에는 아름드리 도래솔들이 팔공산의 지킴이처럼 늠름한 기세를 뽐내고 있다. 계곡 쪽 길을 따라 진곡교를 지나면, 가동도 되지 않는 온천이 원자력 발전소처럼 흉물로 남아 안타깝다. 이곳에서 공산 폭포 위쪽 쉼터까지 오르는 길은 포장돼 있지만, 자동차는 수도사 주차장까지 갈 수 있다.

대한 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 말사인 수도사(修道寺)는 647년(신라 진덕여왕 1) 자장(慈藏)원효(元曉)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원래 사찰명은 금당사(金堂寺)였다. 1296년(고려 충렬왕 22년)과 1805년(순조 5년) 두 차례 중창하였는데, 공산 폭포 위쪽에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돼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1704년(숙종 30)에 그려진 노사나불 괘불탱화가 보물 제12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도사 앞에는 황톳빛을 머금은 소나무들이 짙푸른 잎들을 한 아름씩 안고 하늘로 쭉쭉 뻗어 있어 눈을 시원하게 한다.

수도사를 지나 수도골을 따라 오르면 팔공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을 만날 수 있다. 팔공산의 수많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물이 폭포를 거쳐 널찍한 소를 이루는 곳이다. 여름이면 암반을 따라 흰 눈같이 하얀 물이 모여 옥색을 띤다. 이전에는 돌다리로 건넜지만, 요즘엔 나무다리로 올라 지나간다. 사람들이 건너기에는 편리하지만, 소나무 숲과 바위의 태고적 모습이 인공물로 퇴색되는 느낌도 든다.

나무다리를 지나 숲속 길을 따라 오르면 팔공산 최대의 절경 공산 폭포를 볼 수 있다. 팔공산의 옛 이름 ‘공산’이 남아 있는 폭포로 팔공산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치산리 마을 사람들은 치산 폭포 또는 수도 폭포라 부른다. 사리재골·작은민비골·민비골·동애골·염불골·새미난골 등 팔공산 골짜기에서 토해 낸 물이 3단의 낭떠러지로 떨어져 장관을 연출한다. 팔공산 일대의 계곡에서 가장 많은 물이 모이는 곳으로, 여름이면 짙푸른 숲속에 물안개를 뿜어낸다. 높이 30m인 공산폭포의 총 연장 길이가 60여m에 이른다.

폭포의 비경을 감상하기 위해 예로부터 선비들도 즐겨 이곳을 찾았다. 퇴계 이황(李滉)은 당시 제자였던 신녕 현감 황준량(黃俊良)과 함께 수도 폭포를 찾아 중국의 여산(廬山)에 비유하며 “새로 솟는 폭포가 빼어나 천길 성난 우뢰 같구나. 평상에 기대어 구경하는 곳에 아지랑이 푸르름은 몇 겹이런고”라고 읊었다.

폭포 위의 암반에는 임진왜란 때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지맥을 끊기 위해 쇠 말뚝을 박았다고 전해지는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폭포 위쪽의 평평한 곳에 등산객들이 휴식할 수 있는 쉼터가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주막과 안동 권씨 재실이 있었다고 한다. 고개를 오르내리던 사람들이 주막에서 탁배기를 마시며 피로를 풀었던 곳이다. 1950년대에는 치산 계곡 골짜기에서 산판을 벌여 베어 낸 나무들을 모아 가공했던 제재소가 있었다고 한다.

제재소 터를 지나면 다시 널찍한 암반에 물이 넘쳐흐르는 곳에 현수교가 설치돼 있다. 이 현수교를 건너 오른쪽 산자락을 타고 오르면 진불암과 동봉으로 갈 수 있다. 겨울에 진불암 쪽으로 산행을 할 경우 솔잎과 굴참나무잎, 단풍나무잎 등을 밟으며 갈색 추억을 만들 수 있다. 혼자 호젓하게 오를 땐 산새 소리와 계곡 물소리에 세속의 시름을 말끔히 씻어 낼 수 있다. 왼쪽의 깊은 계곡을 따라 굽이쳐 흐르는 하얀 물줄기도 한 폭의 그림 같다. 내려오는 길에 느긋하게 걸으면 팔공산 계곡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치산1리 영지사 주지 이상열 스님은 “고려 시대 사찰인 진불암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이었다”며 “예전에 스님 70여 명이 있었으나 모두 떠났으며 현재의 샘 옆에 있던 대웅전도 허물어져 없어졌다”고 했다.

공산 폭포 위 현수교 지점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똑바로 올라가면 조그만 다리를 지나 동봉 및 도마재로 가는 갈림길에 팻말이 붙어 있다. 이 팻말과 폭포 위 표지판에는 모두 ‘신녕재’로 표기돼 있지만, 치산마을 사람들은 ‘도마재’라고 했다. 치산 1·2리 사람들은 신녕면 소재지 사람들이 치산 계곡에서 나무를 하거나 산나물을 캔 뒤 이 팻말에서 조금 위쪽의 사리재골을 따라 신녕으로 넘어갔던 산줄기를 신녕재라고 불렀다.

[치산 계곡에 석굴이 있다.]

갈림길의 팻말에서 동봉 쪽으로 가는 길은 군데군데 리본이 붙어 있지만 많이 흐릿해졌다. 동봉 쪽 계곡의 산자락을 따라 500m 정도 가면 왼쪽 골짜기의 산자락에 석굴이 나온다.

석굴은 동봉 쪽으로 가는 오솔길이 끊긴 듯한 지점에서 동쪽으로 30여m 올라간 위치에 있다. 평평한 산자락 왼쪽의 10여m 높이 화강암층 맨 아래쪽에 석굴이 있는데, 나무로 둘러싸여 멀리서 보면 석굴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은폐된 곳이다.

석굴 입구 폭은 2.3m이며, 높이는 1.4m 정도이다. 입구에 낙엽이 많이 쌓여 있으며 퇴적돼 흙으로 변한 흔적으로 보아 현재보다 훨씬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석굴 안의 가로 폭은 4.7m이고, 최고 높이는 1.9m의 아치형 구조로 되어 있다. 바닥에는 부서진 바위 조각들이 퇴적되어 1m 정도 쌓여 있다. 석굴 안의 습기로 인해 바위가 많이 약해져 있으며, 손가락을 대면 떨어져 내릴 정도이다. 바닥의 흙은 깊이 50㎝ 정도로 파낸 흔적이 있다. 누군가 불상을 찾기 위해 구덩이를 판 것으로 보이며 석굴 천장 틈새에 작은 삽 2개가 놓여 있다. 삽이 놓인 천장의 한 켠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다. 원래 바닥은 현재보다 약 1m 더 낮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굴 입구의 오른쪽에는 빗물과 함께 황토가 흘러 든 흔적도 있다. 석굴 입구에 작은 돌 너댓 개가 나란히 놓여진 것으로 보아 예전에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것 같다.

이 석굴은 1942년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기록돼 있다.

이 자료의 영천군의 불상 항에는 “팔공산 아래 진불암 계곡의 암석지 내 일부에 수도사에서 약 20정[1정은 약 109m], 진불암에서 수 정의 산 중턱 거대한 화강암 굴속에 자연석에 조각한 높이 3척[1척은 30.3㎝], 흉폭 1척 8촌[1촌은 1척의 10분의 1]의 좌불상 1구, 높이 3척 4촌, 흉폭 1척 2촌 및 높이 2척 5촌, 흉폭 1척 2촌의 수호불 각 1구가 있는데, 표면에 균열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완전하고 다른 두 구는 일부 파손된 곳이 있어도 거의 완전에 가까우며 근처에 분쇄되어버린 2, 3구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이 석굴에는 불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좋은 불상은 일본인이 가져갔고 나머지는 6·25 이후 산판을 거쳐 도굴 당했을 것이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당시 이 석굴을 ‘제2석굴암’으로 불렀다고 한다. 불상의 유래에 대해 치산1리 영지사 주지 이상열 스님은 “고려 말 승려 신돈(辛旽)의 소환 이후 승려들이 피신할 때 팔공산 사찰의 불상들을 이 석굴에 숨겼다”며 “산판 당시 일꾼들이 석굴에 부처가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일하다 다쳤다”고 하면서, “사리재골과 동애골에도 각각 절터가 남아 있으며 민비골에는 탑이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산판 당시에도 일부 불상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마재 옛길, 대구로 가는 한길]

공산 폭포 위쪽 현수교를 건너지 않고 똑바로 올라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계곡을 따라 도마재로 가는 옛길이 나온다. 동애골로 난 이 옛길을 따라 치산·군위 산성·부계·고로 등 인근 마을 사람들이 등짐을 지고 대구로 넘나들었다. 치산마을 사람들은 주로 산나물과 말린 모과를 등에 지고 도마재를 넘어 대구 서문시장과 칠성시장, 약령시(藥令市) 등에 가서 팔고 생활용품을 구해왔다.

치산1리에 사는 김태진은 “치산에서 신녕과 하양을 거쳐 대구로 갈 경우 100리이지만, 도마재를 넘어 동화사 쪽으로 걸으면 40리에 불과할 정도로 가까워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고갯길로 다녔다”고 말했다. 도마재 가는 길은 요즘 계곡에 깎여 나가 좁아졌지만, 이전에는 치산은 물론 인근 마을 사람들이 대구로 가기 위해 넘던 한길[대로]이었던 셈이다.

항상 맑은 물이 흐르는 이 계곡을 10여 차례 건너 산길을 오르면 도마재에 이른다. 여름에 옛길을 따라 오르면 거의 도마재 근처 골짝까지 물이 흐른다. 옛길 곳곳이 물길에 휩쓸려 사라졌지만, 중간중간에 널따란 길도 남아 있다. 치산과 인근 마을 사람들이 넘나들던 도마재 옛길은 문명의 발달로 흐릿해졌지만, 도시인들은 건강을 위해 다시 이 산길을 찾고 있다.

[참고문헌]
  • 『팔공산 2005년의 기록 팔공산하』(매일신문사, 2006)
  • 『영천 지명유래 및 마을 변천사』(영천문화원, 2010)
  • 인터뷰(영천시 신녕면 치산2리 주민, 전 치산2리 이장 최봉우, 남, 1930년생)
  • 인터뷰(영천시 신녕면 치산1리 주민 김태진, 남, 1933년생)
  • 인터뷰(영천시 신녕면 치산2리 주민 장복근, 남, 1936년생)
  • 인터뷰(영천시 신녕면 치산1리 대한불교태고종 영지사 주지 이상열, 남, 1938년생)
  • 인터뷰(영천시 신녕면 치산2리 이장 임종도, 남, 1961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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