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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경찰서 폭탄 투척 미수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31
한자 永川警察署爆彈投擲未遂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건/일시 1927년 10월 18일 - 장진홍이 대구의 일제 기관 4개소 폭파하려 했으나 불발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8년 1월연표보기 - 장진홍이 영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려 했으나 검거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0년 6월 6일연표보기 - 장진홍 사망
발생|시작 장소 영천경찰서 폭탄 투척 미수 사건 - 경상북도 영천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장진홍|김기용|대한광복회
의의 1920년대 후반기 3대 의열 투쟁 중 하나

[정의]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 후 장진홍(張鎭弘)이 제2차 계획으로 추진한 영천경찰서 폭탄 거사.

[개설]

1927년 10월 18일 정오 경상북도 칠곡 출신의 장진홍이 대구의 일제기관 4개소를 폭파할 목적으로 배달시킨 점화식 폭탄 4개 중 3개가 폭발하여 경관 4명이 중경상을 입고 은행 창문 70여 개가 파손되었다. 그 후 장진홍은 안동과 영천에서도 폭탄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역사적 배경]

1919년 3·1 운동 이후, 국내 비밀 결사 및 무장 단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주변 단체, 만주의 독립군 조직과 기타 단체들의 의혈 투쟁 등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국내외를 통틀어 1920년대 의혈투쟁사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선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단체는 김원봉(金元鳳)을 단장으로 하는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이었다.

의열단이 벌인 대표적인 사건은, 1921년 김익상(金益相)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과 1925년 나석주(羅錫疇)의 조선식산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이다. 의열단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가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재만 독립군의 국내외 의열투쟁은 1920년 봉오동·청산리 대첩(鳳梧洞·靑山里 大捷) 이후 본격화되어 1920년대 중반까지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만주의 독립군 조직인 대한광복군사령부 직속의 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정의부(正義府) 등이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여 일제 주구배 암살, 관리 처단, 일제 기관 방화 및 파괴 공작을 수행하였다.

1920년대에는 개인 단독의 의열 투쟁 또한 활발하게 펼쳐졌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21년 2월 동경 유학생 양근환(梁槿煥)의 친일파 거두 민원식(閔元植) 척살 사건, 1926년 4월 송학선(宋學先)의 금호문 사건, 1928년 5월 조명하(趙明河)의 타이완 타이중[臺中] 의거, 그리고 1927년 10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 등이 있다.

[경과]

경상북도 칠곡 출신의 장진홍은 1916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18년 러시아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동포 청년 70여 명에게 군사 교육을 시켰다. 귀국 후 3·1 운동 때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폭로하고자 전국을 답사하며 실상을 조사하여 해외에 알리기도 하였다.

1927년 장진홍은 경상북도 도청·지방법원·형무소·경찰서 등 9개소의 일제 기관에 폭탄을 투척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일본인 사회주의자 호리키리 모사부로[堀切茂三郞]를 만나 폭탄 제조법을 전수 받았다. 그리고 다이너마이트 뇌관 30개와 도화선 25척(尺)을 구입하여 폭탄을 제조한 뒤 산중에서 위력을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함께 거사를 치를 동지를 구하지 못하자 표적을 도청·경상북도 경찰부·조선은행·식산은행 등 4개소로 줄이고 단독 거사로 방향을 바꿨다.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은 대구 덕흥여관에서 나무 상자 4개에 폭탄을 장치하여 도화선에 점화시킨 뒤, 신문지로 포장하여 선물로 위장한 다음, 여관 종업원 박노선(朴魯宣)에게 조선은행 대구지점, 데후지[須藤] 지사, 이시모토[石木] 경찰부장, 식산은행 대구지점에 하나씩 배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첫 번째로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 폭탄 상자가 배달되었지만, 화약 냄새를 맡은 일본인 행원이 도화선을 끊어 불발했고, 경상북도 지사, 식산은행 지점장, 경상북도 경찰부장에게 배달된 다른 세 개의 상자는 비상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이 도화선을 끊으려는 순간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그 후 장진홍은 피신하여 선산의 동지 집에 은신해 있으면서 안동(安東)과 영천(永川)에서의 폭탄거사를 추진하였다.

1928년 1월 장진홍은 영천 읍내에서 여인숙을 경영하고 있던 김기용(金基用)을 포섭하여 영천경찰서와 영천 읍내의 부자 이인석의 집에 폭탄을 던지기로 모의하였다. 그러나 김기용은 폭탄 투척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검거되고 말았다.

[결과]

장진홍은 수사망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귀족원과 경시청 건물에 폭탄을 투척할 계획을 세웠으나 포탄을 구하려다가 경상북도 도경 형사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1심과 2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장진홍은, 35세가 되던 1930년 6월 6일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의의와 평가]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의거는 1925년 나석주의 폭탄 의거 및 1928년 5월 조명하의 타이완 타이중의거와 함께 1920년대 후반기 민족의식을 고취한 3대 의열 투쟁의 하나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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