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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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川六友堂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찬영 |
건립 시기/일시 | 17-18세기 - 영천 육우당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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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조선 후기 - 영천 육우당 이건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950년대 - 영천 육우당 마루 철거, 방으로 꾸밈 |
개축|증축 시기/일시 | 2010년 - 영천 육우당 마루 복원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2년 9월 17일 - 영천 육우당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4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영천 육우당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현 소재지 | 영천 육우당 -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37번지 |
성격 | 건물 |
양식 | 익공계 맞배집 |
정면 칸수 | 4칸 |
측면 칸수 | 2칸 |
소유자 | 광주 안씨 안귀공파 |
관리자 | 광주 안씨 안귀공파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에 자리한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성재(省齋) 안후정(安后靜)[1659-1702년]과 그의 아들 6형제의 생활 및 학문 공간.
[개설]
영천 육우당은 광주 안씨 영천 입향조인 완귀(玩龜) 증(嶒)의 7세손으로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성재(省齋) 안후정(安后靜)[1659~1702년]이 거처하던 당(堂)으로 그의 장남인 육우당(六友堂) 안여택(安汝宅)[1682년]을 비롯한 안여이(安汝履)[1684년], 안여행(安汝行)[1686년], 안여인(安汝仁)[1690년], 안여기(安汝器)[1693], 안여국(安汝國)[1695] 등 6형제의 우애를 돈독히 하고 학업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당호를 붙여준 것이라 한다. 『육우당기(六友堂記)』에 따르면, 6형제가 부친을 모시고 이 당에서 잠자고, 음식을 먹고 출입하며 학업에 전념하며, 근심과 즐거움을 함께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위치]
영천 육우당이 있는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리는 경상북도 영천시 4번 국도[천문로]상의 도동 네거리에서 한방로로 갈아 타 봉작교차로 못 미친 지점에서 우측의 칠백로로 600m가량 들어간 도남마을에 있다. 영천 육우당은 도남마을회관에서 남쪽 50m 지점에서 삼괴당으로 가는 좌측 시멘트 포장길로 30m가량 간 길가에 있다.
[변천]
영천 육우당의 건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육우당기(六友堂記)』로 보아 대체로 17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 뒤 현 위치로 이건했고, 6·25 전쟁 이후로 대청에 온돌방 1칸을 꾸며 사용해 오다가 2010년 가을에 옛 모습대로 복원, 수리했다. 2012년 9월 17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9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영천 육우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며, 구조는 익공계 맞배 기와집이다. 평면은 우측에 온돌방 2칸을, 좌측에 대청 2칸을 대칭 배열한 우실좌당형(右室左堂形)이다. 온돌방 2칸은 대청과 달리 전면에 툇마루, 후면에는 벽장을 둔 평면이고, 구조는 대량을 통재로 건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특히 온돌방 기둥은 대량 밑에 기둥자리를 파고 받쳤다. 온돌방은 2통 칸이며, 방 가운데의 전·후면 기둥 상·하부에는 마주보는 위치니 동일 규격의 장부 구멍이 남아 있다. 온돌방 가운데 벽체나 창호 등을 설치하기 위한 인방재의 흔적이 아닌가 추정된다. 온돌방 뒤편에는 각기 반침이 설치되어 있는데, 2010년 가을에 벽장문은 쌍여닫이 정자살문으로, 벽체는 합판으로 막음했다. 특히 벽장 상·하인방에는 예전의 문설주 장부 구멍이 남아 있다.
대청은 2통칸 규모이며, 전면만 개방된 구조이다. 좌측면과 후면은 머름을 들인 판벽에 쌍여닫이 울거미띠장널문을 각 칸에 달았다. 특히 6·25 전쟁 이후에 2칸 대청 중 좌측 칸에 온돌방 1칸을 들여 사용하다가 2010년 가을에 예전처럼 마루 깔기, 벽체 마감 및 창호 달기 등으로 복원, 수리했다. 구조는 2010년 가을에 보수한 외벌대의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2칸 온돌방 부분에만 6본의 네모 기둥, 나머지는 두리 기둥을 세우고 심벽을 친 뒤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우측면과 후면의 두리 기둥에는 크고 작은 장부 구멍이 남아 있고, 2칸 온돌방 중 중앙열 기둥 후면의 벽장 기둥은 동바리 이음으로 보수했다. 주상부는 창방을 이익공의 초익공과 십자로 결구한 뒤 주두를 놓아 이익공 및 두공과 각기 결구시켜 처마도리와 그 밑의 받침 장혀와 함께 대량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각 주간의 창방과 처마도리 받침장혀 사이에 초화문을 투각한 화반 1개씩을 배열했다. 익공 형태는 전·후면이 다르다. 전면 외단은 다포계 쇠서처럼 앙서+연봉형인데 비해 내단은 초익공만 초화문형이고 이익공은 간단한 곡선의 조각형이다. 후면은 전면과 달리 외단은 초익공을 다포계 교두형 첨차처럼 가공했고, 이익공은 간단한 직절형이다. 내단은 초·이익공 모두 모두 간결한 사절형이다. 또 두공 역시 전면에는 화려한 조각한 형태이나 후면은 그냥 토막 낸 판재를 겹친 형태이다. 화반 역시 전면은 모두 화려한 초화문 투각 형태이지만, 후면의 온돌방 벽장 칸에 사용된 화반은 단순한 판재형이다. 상부 가구는 건실한 5량 가이다.
대청 상부는 튼실한 대량을 걸고 그 위에 중대공은 주두를 놓고 키 높은 첨차와 제공을 십자로 결구시켜 중도리와 중도리 받침장혀를 받도록 했다. 종대공은 종량 위에 대청 상부에는 원형판대공, 온돌방 상부에는 제형판대공을 각기 세웠다. 한편 대청 상부의 종대공만 양면에 바람개비문양[또는 태극문양]에 흑색을 칠한 원형판대공이다. 창호 중 주목할 것은 청방간 창호이다. 주선에 문지방과 상인방을 건 다음 문설주를 세우고 심벽을 쳐 쌍여닫이 굽널세살문을 달았다. 하지만 상인방에 사분합들문을 달았던 삼베목 자국이 남아 있어 당초에는 사분합들문을 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붕 가구는 대체로 3분변작법을 구사했고, 지붕은 홑처마에 맞배형이다. 장연 일부와 맞배지붕 양 측면의 방풍판은 2010년 수리 때 교체 수리한 것이다.
[현황]
영천 육우당은 광주 안씨 집성촌인 도남리 도남마을에 별다른 부속 건물 없이 단동으로 남아 있다. 마을 내에는 북안천변에 광주 안씨 영천 입향조인 완귀(玩龜) 증(嶒)이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546년(명종 원년)에 지은 완귀정(玩龜亭)[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0호]을 비롯해 숙종 때 학자인 성재(省齋) 안후정(安后靜)[1659~1702년]의 서당인 예남재(禮南齋), 안세징(安世徵)의 고택인 삼괴당(三槐堂) 등의 건물이 있다.
[의의와 평가]
영천 육우당은 17세기경에 건립된 생활 공간 및 학문지소 기능의 건물로 건립된 뒤 조선 후기에 현 위치로 이건했다. 6·25 전쟁 이후에는 대청 2칸 중 좌측 마루 1칸을 온돌방으로 꾸며 사용해 오다가 2010년 가을에 옛 모습대로 복원, 수리했다. 건물은 우실좌당형 평면에 전면 주상부 익공의 섬세한 조각 수법, 건실한 상부 가구 및 대청 종대공에 원형판대공+바람개비 문양 초각, 전후퇴 구조임에도 대량을 통재로 사용한 점 등 건립 당시의 원형을 살필 수 좋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