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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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凞龍 |
이칭/별칭 | 용견(容見),포암(匏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순홍 |
출생 시기/일시 | 1765년 - 전희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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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01년 - 전희룡 식년시 문과에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822년 6월 8일 - 전희룡 사망 |
묘소|단소 | 전희룡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화산리 화촌마을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용궁 |
저술 | 『포암문집(匏菴文集)』 |
대표 관직 |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예조좌랑(禮曹佐郞) |
[정의]
조선 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가계]
전희룡(全凞龍)의 본관은 용궁(龍宮). 자는 용견(容見), 호는 포암(匏菴)이며, 1765년(영조 41)에 태어나 1822년(순조 22) 6월 8일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서강공(西岡公)의 손자인 전오행(全五行)이고, 증조는 전근현(全近玄)이며, 조부는 전상제(全商濟)이다. 아버지는 전우표(全宇杓)이고, 어머니는 한양 조씨(漢陽趙氏)로 조응두(趙應斗)의 딸이다.
부인은 숙인(淑人)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김덕윤(金德潤)의 딸이며, 슬하에 3남을 두니 전석규(全錫奎)·전덕규(全德奎)·전병규(全炳奎)로 모두 통덕랑(通德郞)이다.·
[활동 사항]
전희룡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성격이 침중하고 총명이 남달랐다. 7세에 종숙부 문하에서 수학하여 재주와 근면함에 스승과 부모가 장래를 기대하였으며, 14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일을 먹지 않고 슬퍼하였다.
1801년(순조 원년)에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예조좌랑에 있을 때는 조정에는 당론이 기울어져 강령이 펼쳐지지 못하는지라 벼슬에서 물러나오니 당시의 명사들이 공의 깨달음을 칭찬하여 보내온 편지와 증별시(贈別詩)가 남아 있으며, 한림원(翰林院)과 홍문관(弘文館)에 성예(聲譽)가 크게 드러났다.
[학문과 저술]
시문을 엮어서 만든 『포암문집(匏菴文集)』이 있다.
[묘소]
전희룡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화산리 화촌(花村)마을에 있으며, 인암(忍菴) 권상규(權相奎)의 갈문(碣文)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