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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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夢龜 |
이칭/별칭 | 여휴(汝休),화서(華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민욱 |
[정의]
조선 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개설]
영양 김씨의 시조(始祖)는 영의공(英毅公) 김충(金忠)이다. 712년 10월 1일 중국 하남성(河南省) 여남(汝南)에서 출생하였으며 벼슬은 당 왕조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755년(신라 경덕왕 14)에 안렴사(安廉使)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태풍을 만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죽도에 표류해 오게 되었다.
경덕왕이 당 천자(天子)에게 이 소식을 아뢰자,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남았으므로 본인이 원하는 곳에 살도록 허락하였고 김충은 신라에서 살기로 결정하였다.
경덕왕은 그가 여남에서 왔다 하여 남(南)이라 사성(賜姓)하고 민(敏)이라 개명(改名)한 다음 영양현에서 살도록 하고, 그 고을을 식읍(食邑)으로 하여 영의공(英毅公)에 봉하였다.
남민으로 개명한 김충은 우리나라 영양 남씨 시조가 되었고, 사성 뒤에 태어난 여러 아들들은 모두 남씨 성이 되었으나 맏아들로 사행길을 수행했던 복야(僕射) 김석중(金錫中)은 구성(舊姓)인 김씨를 따라 영양 김씨의 세계를 이었다.
그 후 중도에 세계가 불분명해졌다가 고려조에 첨의참리상호군(僉議參理上護軍)을 지낸 김충황(金忠晃)을 1세(世)로 하여 세계를 다시 이어오고 있다. 영양 김씨 영천 입향조는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낸 김경손(金庚孫)이다.
[가계]
김몽구(金夢龜)의 본관은 영양, 자는 여휴(汝休), 호는 화서(華棲)이다. 1545년(인종 1) 2월 8일 대수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615년(광해군 7) 8월 14일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감사(監司) 김중공(金仲恭)이며, 증조는 영천 입향조인 김경손(金庚孫), 조부는 전라감사(全羅監司) 김처리(金處利)이다. 부친은 전력부위부장(展力副尉部將) 김세견(金世堅)이며, 모친은 의인(宜人)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김우상(金寓祥)의 딸이다.
첫째부인은 의인(宜人) 나주 정씨(羅州丁氏)로 참봉(參奉) 정윤(丁尹)의 딸이며, 둘째부인은 의인(宜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권덕례(權德禮)의 딸이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니 아들은 김성흡(金成翕), 평구도찰방(平邱道察訪) 김시흡(金時翕)과 김원흡(金元翕)이며, 사위는 강경린(康景麟)이다.
[활동 사항]
김몽구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성장하여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성리지설(性理之說)을 듣고, 권응수(權應銖)·곽재우(郭再祐)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임진왜란 때는 권응수와 함께 의병활동을 벌이다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그 후 부모의 노령으로 인해 사임하고 돌아와 효도를 행하였다. 1602년(선조 35)에 천거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고 독서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
[저술 및 작품]
목판본인 2권 2책의 『화서집(華棲集)』이 있다.
[묘소]
김몽구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화산1리 화촌(花村)에 자좌(子坐) 향으로 있으며, 풍산(豊山) 유후조(柳厚祚)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묘소 아래 묘재인 영모재(永慕齋)가 있으며,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연계1리에 소요처인 화서정(華棲亭)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