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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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致斗 |
이칭/별칭 | 경칠(景七),죽오(竹塢)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구전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미애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효자.
[가계]
이치두(李致斗)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경칠(景七), 호는 죽오(竹塢)이며, 1824년(순조 24)에 태어나 1889년(고종 28) 10월 4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통덕랑(通德郞) 이만휘(李萬輝)이며, 증조는 수직(壽職)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 판윤(漢城判尹) 이광옥(李光玉), 조부는 통덕랑(通德郞) 이경원(李慶愿)이다. 아버지는 이수형(李秀亨)이며, 어머니는 성주 도씨(星州都氏)로 도명인(都命寅)의 딸이다.
부인은 영인(令人)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박장상(朴丈祥)의 딸이며, 슬하에 3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영릉 참봉(英陵參奉) 이진학(李震鶴)과 이진규(李震逵)·이진적(李震迪)이며, 사위는 창녕인(昌寧人) 조홍승(曺洪承)이다.
[활동 사항]
이치두는 효심이 깊어 아버지가 병들자 약을 구하기 위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갔는데, 밤늦게 산을 오르면 효성에 감동한 호랑이가 호위해 주었다고 한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밤낮으로 슬피 우니 눈물이 말라 핏방울이 흘렀다고 하며, 또 척추가 휘어져 지팡이에 의지하여 겨우 일어섰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웃을 가족처럼 여겨 1852년(철종 3)부터 3년간의 기근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제하니 소문이 각지에 퍼져 칭송이 자자하였다. 1904년에 정려 되고 종사랑(從士郞)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묘소]
이치두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월곡동 복곡(福谷)에 간좌(艮坐)향으로 있으며, 도사(都事) 김규화(金奎華)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04년경에 나라에서 정려될 때 건립된 정효각(旌孝閣)이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구전리에 남아 있다. 정효각은 방형의 토석담을 두르고 정면에 일각문을 세워 출입토록 했고, 내부에 이치두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