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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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時復 |
이칭/별칭 | 내백(來伯),신와(愼窩)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미애 |
출생 시기/일시 | 1758년 - 이시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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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99년 1월 23일 - 이시복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22년 - 이새복 조봉대부 동몽교관에 임명됨 |
묘소|단소 | 이시복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대의리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성산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효자.
[가계]
이시복(李時復)은 고려 개국공신 이능일(李能一)을 시조로 하는 성산 이씨(星山李氏) 후손이다. 처음 영천에 입향한 사람은 17세(世) 이석보(李錫保)의 넷째아들 이방(李芳)으로 이시복의 9대조가 된다.
이시복의 자는 내백(來伯), 호는 신와(愼窩)이며, 1758년(영조 34)에 태어났다. 고조는 통덕랑(通德郞) 이기(李淇)이며, 증조는 이세성(李世晟), 조부는 이민재(李敏材)이다. 아버지는 이상형(李祥衡)이며,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조용운(曺龍運)의 딸이다.
부인은 영인(令人) 오천 정씨(烏川鄭氏)로 정주경(鄭周慶)의 딸이며, 슬하에 2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이정인(李挺仁)과 이채인(李彩仁)이며, 사위는 완산인(完山人) 이원식(李元植)과 창녕인(昌寧人) 조경발(曺慶潑)이다.
[활동 사항]
이시복은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님을 봉양하였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산방에서 책을 읽다가 『소학(小學)』의 ‘문왕께서 하루에 세 번 부모님을 찾아뵈었다’는 부분에 이르러 책을 덮고 말하기를, “예전의 성인께서는 하루에도 오히려 세 번 어버이를 찾아뵈었다고 하는데, 나는 능히 한 달에 세 번도 찾아뵙지 못하니 가히 자식된 도리라 말을 하겠는가!”라고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찾았다.
이에 아버지는 “우리 집의 소학아(小學兒)[소학을 몸소 실천하는 아이]로구나”라며 기뻐하였다.
그는 또한 “사람의 자식이 과거시험에 응함은 장차 급제함으로써 어버이의 영광을 구하려 함일진데, 급제하지 못한다면 이는 어버이를 속이는 것이리”라며 과거 공부를 접고 성현의 격언을 발췌하여 삼강실록(三綱實錄)을 만들어 자주 보며 익혔다.
어머니 창녕 조씨(昌寧曺氏)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여 어머니가 세 번 회생하였으며, 초상을 당하여 성복(成服)하였는데 슬픔으로 병이 나서 1799년(정조 23) 정월(正月) 23일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이시복의 묘소는 영천시 고경면(古鏡面) 대의리(大儀里) 지동(枝洞)의 청룡등(靑龍嶝)에 사좌(巳坐) 향으로 있으며,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1822년(순조 22)에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