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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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愈敏 |
이칭/별칭 | 내적(乃績),누항(陋巷)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미애 |
출생 시기/일시 | 1692년 12월 16일 - 서유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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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27년 1월 2일 - 서유민 사망 |
묘소|단소 | 서유민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학리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대구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효자.
[가계]
서유민(徐愈敏)의 본관은 대구. 자는 내적(乃績), 호는 누항(陋巷)이며, 1692년(숙종 18) 12월 16일에 태어나 1727년(영조 3) 1월 2일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서유민의 고조는 선무랑(宣務郞) 서강인(徐疆仁)이며, 증조는 서행달(徐行達), 조부는 서대래(徐大來)이다. 아버지는 서지해(徐至海)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생원(生員) 이석(李碩)의 딸이다.
부인은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진사(進士) 이덕표(李德標)의 딸이며, 슬하에 3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서성기(徐聖夔)·서성익(徐聖益)·서성직(徐聖稷)이며, 사위는 안동인(安東人) 권제행(權濟行)이다.
[활동 사항]
서유민은 성품이 영민하여 5세부터 학문을 익혀 7세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이형상(李衡祥)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고제(高弟)를 허락 받았고, 정만양(鄭萬陽)과 정규양(鄭葵陽) 또한 통재(通才)로써 칭찬하였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워 능히 소생시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학리 이동(梨洞)에 병좌(丙坐) 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