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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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裕仁妻密陽朴氏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오미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최미애 |
묘소|단소 | 정유인 처 밀양박씨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오미동(五味洞) 삼귀(三歸) 해좌(亥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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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 정유인 처 밀양박씨 정려비 - 경상북도 영천시 오미동 삼귀마을 밀양 박씨 묘소 앞 |
성격 | 열녀 |
성별 | 여 |
본관 | 밀양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열녀.
[가계]
정유인(鄭裕仁)의 처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박형태(朴亨泰) 딸이다. 정유인은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의 후손으로, 고조는 정기양(鄭岐陽), 증조는 정일종(鄭一宗), 조부는 정하시(鄭夏時), 아버지는 정진휴(鄭軫休), 어머니는 영산 신씨(靈山 辛氏) 신명신(辛命新)의 딸이다.
밀양 박씨는 슬하에 후사(後嗣)가 없어 정유인의 아우 정유표(鄭裕杓)의 차남 정치영(鄭致英)으로 뒤를 이었다.
[활동 사항]
정유인 처 밀양 박씨는 평소 효행이 지극하여 시어머니가 중병에 걸렸을 때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완쾌시켰다. 얼마 뒤 남편이 난치병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녀는 한 번 울고는 정신을 차려 시부모에게 “남편은 떠났지만 아이가 있으니 이 아이를 보시고 슬퍼하지 마십시오”라고 위로를 하며 지냈는데 아이마저 죽어 버렸다.
그녀는 시부모의 마음이 진정된 후에 조용히 말하기를, “이제 시동생이 집안을 돌볼 수 있을 만큼 성장했으니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남편과 자식이 다 죽었는데 저 혼자만 살 수는 없습니다”라며 그날 밤 약을 먹고 자결했다. 그녀의 나이 24세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고을 선비들이 군수와 관찰사에게 청원하여 정려각과 정려비를 세워 그녀의 효열을 기리게 되었다.
[묘소]
정유인 처 밀양 박씨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오미동(五味洞) 삼귀(三歸) 해좌(亥坐)에 합폄(合窆)이다.
[상훈과 추모]
영천시 중앙동 녹전마을에 있던 효열각이 몇 해 전에 건물이 허물어지고 현재 빈 터만 남아있어 윤리강상(倫理綱常)이 허물어진 듯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으나, 후손들에 의해 정려비는 오미동 삼귀마을 밀양 박씨 묘소 앞으로 옮겨 세워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다.